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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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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시6

(은언군 배) 전산군부인 전주이씨 https://blog.naver.com/madangca/222849873023 (은언군) 전산군부인 전주이씨 https://blog.naver.com/madangca/30107329333 (장조-은언군) 전1... blog.naver.com 전산 군부인 이 씨(全山郡夫人 李氏, 1764년 - 1819년), 전 주인(全州人) 이덕희(李德喜)의 딸이시라며 전계 대원군의 생모이시다. *현재 묘는 파묘되었다. 2022. 8. 16.
(독립운동가) 어갑수 독립운동가 어갑수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1908년 교동(校洞)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중퇴했다. 1909년 4월부터 1911년 3월까지 휘문의숙 예비과에서 수학했다. 그해 4월부터 1913년 3월까지 서울 중앙학교에서 수학했다. 같은 해 4월 경성전수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3월 졸업했다. 이후 포천 청성학교(靑城學校) 교원으로 근무했다. 1915년 3월 청성학교를 그만두고 1916년 5월 철원 사립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7월 퇴직했다. 1922년 2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제령(制令) 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시대일보』 기자가 되었다. 1924년 11월 화요회에 가입했다.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경성부 .. 2017. 12. 22.
(애국지사) 의병 신관수 -평산신씨- 의병 신관수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이다. 1908년 4월 이후 정용대(鄭容大) 의병장 휘하에서 통진군(通津郡) 교하면(交河面)·풍덕면(豊德面), 강화(江華)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벌였다. 그 뒤 1909년 6월 강화도 고도(高島) 해안에서 선박을 습격하여 군량을 확보하는 등의 활동을 벌이다. 피체되었다. 같은 해 7월 15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죄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7. 12. 22.
(독립운동가) 임용우 -부안임씨- 독립운동가 임용우 1884년(고종 21) 경기도(지금의 인천광역시) 김포(金浦)에서 태어나, 10년간 서당에서 한학을 익힌 뒤, 4년 동안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3년간 마산 창신학교(昌信學校) 교사로 있다가 덕적면(德積面)에 사립 명덕학교(明德學校)를 설립하고 8년간 교사로 재직하였다. 명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19년 2월 말에 천도교(天道敎) 측의 연락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 그해 3월 1일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같은 달 29일에는 윤영규(尹寧圭)·최복석(崔復錫) 등과 월곶면(月串面) 갈산리(葛山里)·조강리(祖江里) 일대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이어 군하리(郡下里) 향교와 공립보통학교·면사무소를 차례로 행진하면서 항일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9일에는 덕적.. 2017. 9. 26.
(독립운동가) 어수갑 독립운동가 어수갑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1908년 교동(校洞)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중퇴했다. 1909년 4월부터 1911년 3월까지 휘문의숙 예비과에서 수학했다. 그해 4월부터 1913년 3월까지 서울 중앙학교에서 수학했다. 같은 해 4월 경성전수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3월 졸업했다. 이후 포천 청성학교(靑城學校) 교원으로 근무했다. 1915년 3월 청성학교를 그만두고 1916년 5월 철원 사립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7월 퇴직했다. 1922년 2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제령(制令) 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시대일보』 기자가 되었다. 1924년 11월 화요회에 가입했다.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경성부 .. 2017. 9. 26.
(독립운동가) 전태순 독립운동가 전태순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이다. 1919년 3월 23일 김포군 양촌면(陽村面)에서 박충서(朴忠緖)가 주도하는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 박승각(朴勝珏)·박승만(朴勝萬)·안성환(安聖煥) 등과 함께 격문과 선언문 10여매를 작성하여 인근마을 주민들에게 배부한 후, 이날 양곡(陽谷)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는 등 일경의 총격에도 굴하지 않고 활동을 계속하다.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었다. 이해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6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17.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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