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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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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서씨5

(문신, 충남 당진시) 중호 이미, 정부인 대구서씨 -덕수이씨- 조선후기 경상도관찰사, 부제학,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중호(仲浩). 한성판윤 이광하(李光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이집(李㙫)이고, 아버지는 이주진(李周鎭)이다. 어머니는 민진원(閔鎭遠)의 딸이며, 부인은 서명빈(徐命彬)의 딸이다. 일찍이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정랑(正郞)으로 재직하던 1757년(영조 3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정언(正言)으로 재직 중 간쟁에 충실하다 한때 영조의 미움을 샀고, 그 뒤 수찬으로 옮겼으나 1759년 일시 파직되기도 했다.이어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가 중앙 관직으로 복귀한 1760년을 전후로, 세자시강원의 겸찬독(兼贊讀)을 맡아 세손의 강학(講學)에 심혈을 기울여 영조의 신임을 얻기도 했다. 아울러 홍문관교리로 있으.. 2022. 6. 17.
(종친) 흥완군 문간공 이정응, 정경부인 대구서씨, 정경부인 순천박씨 -전주이씨- 흥완군 문간공 이정응 흥완군 이정응(興完君 李晸應, 1814년 2월 16일 ~ 1848년 5월 18일)은 조선 시대의 문신, 왕족이다. 은신군의 양손자이며 남연군 이구와 군부인 여흥 민씨의 둘째 아들이다. 흥인군, 흥선대원군의 형이며 흥녕군의 동생이다. 1865년 9월 14일 신정왕후 조대비의 명으로 특별히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처음 이름은 시응(是應)이었다. 자는 시백(眂伯), 시호는 문간(文簡). 흥완부정에 봉작된 뒤 도정으로 진봉되었고, 효명세자묘 수원관, 순조 사후 산릉도감과 빈전 대전관,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역임했다. 1844년에는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현록대부에 이르렀다. 조카 고종 즉위 후 신정왕후의 특명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은신군의 양자인 남연군 이구와 선공감감역 증 .. 2017. 4. 19.
(문신) 경중 권극례, 정부인 대구서씨 -안동권씨- 경중 권극례 1531 ~ 1590 본관 안동. 자 경중(敬仲). 종묘서(宗廟署) 영(令) 덕유(德裕)의 아들. 예조판서 극지(克智)의 형. 1558년(명종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승문원(承文院)과 예문관의 벼슬을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을 지냈으며, 사간원의 정언(正言)으로 옮겨 당시의 권신들을 탄핵하여, 직언으로 이름을 떨쳤다. 1566년 병조좌랑이 되고 이어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 헌납을 역임하였으며, 성균관 사성(司成)에 올라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0년(선조 3) 부수찬이 되고 이어 원주 ·길주목사, 의주부윤(義州府尹) ·충청도관찰사 등 외관직으로 돌다가 판결사(判決事) ·우부승지를 지내고 1581년 호조참판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3년 함경도관.. 2016. 9. 24.
(문신) 위산 서광범, 정경부인 안동김씨, 정경부인 밀양박씨 위산 서광범 1859(철종 10)∼1897. 조선 말기의 관료·정치가.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서구(敍九), 호는 위산(緯山). 증조부는 순조 때의 영의정 용보(龍輔)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낸 상익(相翊)이다. 일찍이 박규수(朴珪壽)·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 등의 영향을 받아 1879년경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과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1880년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규장각검교(奎章閣檢校)·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세자시강원 겸 사서(世子侍講院兼司書)·세자시강원 겸 필선(世子侍講院兼弼善)·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 등을 지냈다. 1882년 4월 김옥균을 수행해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고 귀국한.. 2013. 9. 29.
(문신) 백영 홍철주 [효헌공], 정부인 대구권씨, 정부인 전주이씨 효헌공 백여 홍철주 본관은 풍산, 자는 백영(伯泳)이며, 홍일모(洪一謨)의 아들로 서울에 거주하였다. 1859년(철종 10) 진사로서 증광별시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866년(고종 3) 공충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철저히 염찰한 공으로 이듬해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1871년(고종 8) 5월 여주목사로 부임하여 11월 진주부사로 옮겼다. 1875년 안동부사로 있을 때 울산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로 파견되어 난을 수습하였다. 그후 이조참의·성균관대사성·승지·이조참판·한성부판윤을 거쳐 1884년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일어난 갑신정변이 실패한 직후 사대당(事大黨) 내각이 수립될 때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1885년 한성부판윤·형조판서·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87년 3월 전보국총판이 되어 전선(.. 2012.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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