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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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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동공원묘지4

(독립운동가) 김봉성 -망우리공원묘지- 독립운동가 김봉성 1919년 3월 1일 평북 선천군(宣川郡) 선천읍(宣川邑)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선천의 만세시위는 민족대표였던 이승훈(李昇薰)이 신성학교(信聖學校) 성경교사였던 홍성익(洪盛益)에게 3월 1일 신성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부탁하며 추진되었다. 홍성익은 동료 교사인 김지웅(金志雄) 등과 연락을 취하며 만세시위 계획을 추진하였다. 신성학교 내의 업무는 김지웅이 담당하였는데, 그는 학생들을 불러 독립선언서 등사 등을 맡겼다. 당시 신성학교 4년생이던 그는 김지웅의 지시에 따라 동급생인 장일현(張日炫)·고병간(高秉幹)·박찬빈(朴贊彬) 등과 함께 도쿄[東京]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한편 시위 현장에서 사용할 태극기도 대량으로 제작하였다. 3.. 2016. 1. 22.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초장지 -망우리공원묘지-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초장지 2016. 1. 20.
(독립운동가) 태허 유상규 -망우리공원묘지- 독립운동가 태허 유상규 유상규(劉相奎, 1897~1936)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외과의사로서 대중 의료보건에 힘썼다. 호는 태허(太虛). 본관은 강릉. 1897년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읍 서부동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태허이다. 경신중학교에 입학, 1916년 3월 제11회로 졸업하고 그해 4월에 새로 설립된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에 [제1회]로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 에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을 모으고 동원하는 등 3.1 독립운동의 주된 역할을 하였으며 ( 압록강은 흐른다, 이미륵 참조)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을 1년 앞둔 3학년을 다 끝마친 때였으나 학업을 포기하고 상해로 망명하였으며 학교는 퇴교를 당하였다.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상하이로 건너간 유상규.. 2016. 1. 20.
(독립운동가, 언론인) 위창 오세창 -민족대표33인, 망우리공원묘지- 민족대표 33인 위창 오세창 1864(고종 1)∼1953. 서예가·언론인·독립운동가.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명(仲銘), 호는 위창(葦滄·韙傖). 서울 출생. 조선 말기 중국어 역관이며 서화가·수집가였던 경석(慶錫)의 장남이다. 20세에 역관이 되었다가, 1886년 박문국 주사로서 ≪한성순보≫ 기자를 겸하였다. 1894년에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이 되었고, 이어 농상공부 참서관, 통신원 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897년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교사로 1년간 체류하였다. 1902년 개화당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던 중에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06년 귀국 후 ≪만세보≫·≪대한민보≫ 사장을 역임하였고,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 2016.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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