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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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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4

(천주교 복자, 경기 광주시) 복자 정철상 가를로 -나주정(丁)씨- 본관은 나주이며, 세례명은 가롤로이다. 경기도 광주의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정약종(丁若鍾)과 한산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1839년에 순교한 유 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계모이다. 정하상(丁夏祥) 성인과 정정혜(丁情惠) 성녀의 이복형이며, 포천 출신인 홍교만(洪敎萬) 복자(福者)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켜 제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에 집안 어른이 천주교를 금지하고 신부를 고하라며 송곳으로 찌르기도 했지만, 정철상은 결코 신부를 고발하지 않았다. 이처럼 유명한 가문의 후손이었지만, 아버지 정약종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것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만 의미를 .. 2022. 8. 7.
(천주교) 주문모 야고보 천주교사제 주문모 야고보 신부 주문모 야고보 신부 (1752~1801년) 1752년 중국 강남성 소주에서 태어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성장하는 동안 그는 스스로 서양의 학문에 흥미를 느꼈으며 천주교 교리를 접하고는 이를 진리라고 생각하여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후 그는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당시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는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신앙심이 깊은 데다가 중국 문학과 교회 신학에도 능통한 주문모 신부가 여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주 신부는 성무 집행을 위한 모든 권한을 부여받고 1794년.. 2012. 7. 20.
(문신) 복암 이기양, 정부인 양천허씨 복암 이기양 자는 사흥(士興), 호는 복암(伏菴), 덕형(德馨)의 7세손. 1774년(영조50) 진사시(進士試)에 수석으로 합격, 영릉 참봉(英陵?奉)이 되고, 1795년(정조1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어어 검상(檢詳)·승지(承旨)를 역임하고, 1798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나갔다가 1800년 진하부사(進賀副使)로서 청나라에 갔다. 이 때 천주교 교리를 듣고 은밀히 신봉했으며, 돌아와 실학자 이가환(李家煥)등과 사귀며 서학(西學)을 강론, 나라의 혁신을 위해 서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병조 참판(兵曹參判)·우승지(右承旨)·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1801년(순조 1) 대사간에 전임, 예조 참판·좌승지를 지냈다. 이 해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 2012. 7. 20.
(서학) 강완숙 골룸바 최초의 여성회장 강완숙 골룸바 강완숙(姜完淑)1760(영조 36)∼1801(순조 1). 초기 천주교회의 순교자. 최초의 여성회장이다. 세례명 골롬바.충청남도 내포지방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덕산에 사는 홍지영(洪芝榮)에게 후처로 시집갔으나, 천주교가 충청도지방까지 전해지자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남편과 헤어져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 필주(弼周)와 함께 서울로 이사해 살았다.서울에 올라온 뒤 교우들과 접촉하면서 전교에 힘쓰는 한편, 지황(池璜) 등을 도와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영입하는 데 큰 소임을 하였다. 주문모가 1794년(정조 18)12월 밀입국하여 서울 최인길(崔仁吉)의 집에 숨어서 전교활동을 하던 중, 1795년 6월 배교자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강완숙은 그를 자기집 .. 2012.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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