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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원군(관직)묘

(공신) 아성부원군 이산해 [문충공], 정경부인 양주조씨

by 보현당 2013.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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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성부원군 문충공 이산해

 

1539(중종 34)∼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 장윤(長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치(穉)이고,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지번(之蕃)이며, 어머니는 남수(南脩)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지함(之菡)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등용되고, 이듬 해 홍문관정자가 되어 명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대액(景福宮大額)을 썼다. 이어 부수찬이 되고 1564년 병조좌랑·수찬, 이듬 해 정언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원접사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명나라 조사(詔使)를 맞이한 뒤 이조정랑·의정부사인·사헌부집의·상의원정(尙衣院正)·부교리를 역임하고, 직제학이 되어 지제교를 겸하였다. 이어 교리·응교를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마친 뒤 1570년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1577년 이조·예조·형조·공조의 참의를 차례로 지내고 대사성·도승지가 되었다. 1578년 대사간이 되어 서인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윤현(尹晛) 등을 탄핵해 파직시켰다. 다음 해 대사헌으로 승진하고 1580년 병조참판에 이어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이듬 해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오르고, 다시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제학·대제학·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를 겸하였다.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 무렵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다음 해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며, 종계변무(宗系辨誣 : 명나라 ≪태조실록≫≪대명회전≫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도록 요청한 일))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이듬 해 정철(鄭澈)이 건저(建儲 : 세자 책봉) 문제를 일으키자 아들 경전(慶全)을 시켜 김공량(金公諒 : 仁嬪의 오빠)에게 정철인빈신성군(信誠君)을 해치려 한다는 말을 전해 물의를 빚었으며, 아들로 하여금 정철을 탄핵시켜 강계로 유배시켰다. 한편 이와 관련해 호조판서 윤두수, 우찬성 윤근수백유성(白惟成)·유공진(柳拱辰)·이춘영(李春英)·황혁(黃赫) 등 서인의 영수급을 파직 또는 귀양보내고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해 개성에 이르렀으나,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도록 했다는 양사(兩司 : 사간원·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어 백의(白衣)평양에 이르렀으나, 다시 탄핵을 받아 평해(平海)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1595년 풀려나서 영돈녕부사로 복직되고 대제학을 겸하였다. 북인이 다시 분당 때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홍여순(洪汝諄) 등과 대북파가 되어 영수로서 1599년 재차 영의정에 올랐다. 이듬 해 파직되었다가 1601년 부원군(府院君)으로 환배(還拜 : 복직되어 제수됨)되었으며, 선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맡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동으로 불렸으며, 특히 문장에 능해 선조조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한다. 서화도 잘해 대자(大字)와 산수묵도(山水墨圖)에 뛰어났으며, 용인의 조광조묘비(趙光祖墓碑)와 안강의 이언적묘비(李彦迪墓碑)를 썼다. 이이(李珥)·정철과 친구였으나 당파가 생긴 뒤로는 멀어졌다. 저서로 ≪아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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