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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완천부원군 이순신 [무의공] [완천군] -전주이씨-

by 보현당 2014.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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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천부원군 무의공 이순신 [완천군]

 

 

이순신(李純信, 15531227~ 161192) 대군의 5남 장평부정(長平副正)의 4대손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완원군(完原君) 진(眞)과 성균진사 안동김씨 구수(龜壽)의 딸인 정경부인 사이에 1553년(명종 8) 12월 27일에 시흥군 서면 일직리에서 5남으로 태어났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학에 힘썼으며 지혜가 뛰어났다. 장성하면서 인격이 준엄하며 단정하고 지조가 굳었다. 24세 되던 1577년(선조 10) 9월에 알성별시(謁聖別試) 을과에 급제하였으며, 활쏘기 대회에서 장원한 상으로 북방방위에 나가는 것을 면제받았다. 1580년(선조 13)에 타인의 모함으로 선전관에서 파직되었으나 그 해 겨울 다시 선전관이 되었다. 1582년(선조 15)에 비국랑(備局郞)을 겸임하고 이듬해 4월에 강진현감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호족(豪族)들의 농간으로 1585년(선조 18)에 파직되었다가 별명(別命)을 받아 선전관에 복직되어 어전을 호위하다 옛 스승인 김성일(金誠一)의 천거로 1586년(선조 19) 함경도 은성부 판관이 되었다.
 1588년(선조 21)에 부친상을 탈상하고 의주판관(義州判官)으로 발탁되어 중국사절단의 행차시 요구하는 것을 노자만 주고 모르는 체하자 중국사절단이 귀국길에 문책하려 함에 군무를 잠시 떠남으로써 또 다시 파직되었다. 1589년(선조 22)에 함경도 혜산진첨사(惠山鎭僉使)에 임명되어 호족의 침략을 막으러 나갔으나 부임 도중 발병하여 적군이 관하(管下)의 운총벽(雲寵壁)을 네 차례나 침입함을 막지 못하여 함경도 조방장 한극성(韓克誠)의 문책을 받았으나 선조대왕이 감율(減律)을 명했다. 그러나 전 상사와의 불화로 부하관과 함께 삼수(三水)로 가게 된 것을 선조대왕이 전라도 영암으로 귀양가 있게 했다. 2년 후에 일본통신사 일행이 왜구의 변을 고하자 재등용되었으며, 1591년(선조 24) 방답진첨사(防踏鎭僉使)로 부임되어 무신끼리의 사보연통(私報緣通)으로 전라수사 이순신의 전선(戰船) 제작에도 많은 자문을 받는 한편 관내의 성지(城池) 기계(機械) 축성과 제작에 전력함으로써 망루(望樓) 주로(舟櫓) 군기영기(軍旗令旗)들이 일제히 정비 되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왜적이 침입해 오자 전라수사 이순신이 관하 전선 24척을 총동원하라는 명령을 하자 공이 나서서, 같은 해 5월 20일부터 옥포(玉浦)해전에서 적선 50여 척, 합포(合浦)해전에서 적선 5척, 고성(固城)해전에서 적선 13척, 노량(露梁)해전에서 적선 1척, 사천(泗川)해전에서 적선 12척을 격파하여 이순신의 신임을 받았다. 6월에는 당포(唐浦)까지 나가 적선 20여 척을 불사르고, 거제도(巨濟島)의 적 근거지로부터 적선 10여 척이 지원오는 것을 격추하였으며 당항포(唐項浦)로부터 엄호하는 적선 26척과 포구에 있는 적선 5척을 격파하였다. 또한 사살한 적이 수백명에 이르고 비단군복에 대검을 짚고 있던 적장도 1명 생포하였으며, 노획품 가운데는 적의 부장들의 결사혈진시킨 지련(祗聯)이 6권이나 되었다. 7월에는 가덕도, 거제도에 적선을 추격하다 견내량(見乃梁)의 적선 73척을 발견하고 하루 종일 한산(閑山) 앞바다로 유인하는 일을 전담하여 끝내 적을 몰살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가덕도의 적은 한산도 패전에 겁을 먹고 사기가 떨어졌으므로 공이 먼저 나가 육박하여 적선을 격침하였다. 8월, 적들이 위축되어 부산 앞바다에 잠복하고 있는 것을 공이 선봉장이 되어 화존포(和尊浦)에서 적선 5척을 유인하여 격파하고, 서대포(西大浦)에서 8척을, 서평포(西平浦)에서 9척을 격파하고 절영도(絶影島)에서도 적선 2척을 섬멸하였다. 9월에 들면서 부산 앞바다의 왜적 근거지를 섬멸하기 위한 초계(哨戒)와 탐보(探報)를 수없이 수행한 끝에 적선 5백여 척이 세 곳으로 분진(分陣)하고 있는 것을 포위전멸시키는 등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적의 사기를 기습공격으로 좌절시켰으나 계속되는 기습공격으로 공의 부하들은 적의 수급을 모을 기회를 놓침으로써 공의 공적이 조정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고심하였다고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적고 있다.
 1593년(선조 26) 적군이 화의를 내세워 접전이 뜸한 동안에 충무공 이순신은 보고서에 “리순신(李純信)은 호남 영남 개전 이래 10회에 걸쳐 1회는 중군(中軍)을, 9회는 선봉을 맡아서 오직 적의 기세를 꺾는 데 전념하느라고 적의 수급을 모아 공적을 자랑할 겨를이 없기에 특별히 앞세워 상계(上啓)했건만 논공(論功)이 홀로 순신(純信)에게 미치지 못하와 유전지공(有戰之功) 무전지상(無戰之賞)이라는 군심(軍心)의 원망이 있습니다.”고 하므로 선조대왕으로부터 절충장군(折衝將軍)에 특진되었으며, 1594년(선조 27)에 충청수사(忠淸水使)에 보직되었다. 그러나 왕명특사(王命特使)는 군율을 엄격하게 한다며 형벌과중(刑罰過重)으로 보고하고, 보령(保寧) 토호 김태국(金泰國)이 사노(私奴) 한손(漢孫)을 시켜서 낸 무고도 보고되어 공은 구금 조사받게 되었다. 1595년(선조 28)에 다시 풀려나 고령진첨사(高嶺鎭僉使)로 강등되어 임명되었다.
 1596년(선조 29)에 발병하여 첨사직에서 사임하였다가 이듬해 왜적의 재침이 전해지자 비변사에 의하여 공은 유부수군장(留部水軍將)으로 임명되었다. 그동안 구금 조사받던 이순신의 후임으로 통제사에 승진된 원균이 일전에 대패하고 전사하자 이순신이 또 다시 통제사로 복직되면서 공은 경상우수사로 일선배치되어 전라도 고령도(高嶺島)에 군사를 머물게 하고 전비를 가다듬어 흥양(興陽)에서 적선 30여 척을 괴멸시켜 일승을 올리자 선조대왕은 특별히 가선대부에 승차시켰다. 적의 우두머리 행장(行長)이 순천(順天)에 성을 쌓고 지킴으로 명나라 장군 유정(劉綎)과 진린(陳璘)이 해구(海口)를 수비하다 행장(行長)이 드디어 거제 · 해남 · 고성의 패잔병을 총동원하여 야습을 감행해 왔다. 충무공 이순신 이하 전군은 총공격을 준비하고 예비복병인 공은 적의 귀로를 추격하여 남해 노량의 여울목에서 예비복병인 공은 어영담(魚泳潭) · 변흥립(邊興立)의 군사와 함께 쳐들어오는 적과 대접전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적탄을 맞고 전사하자 공0000 부장(副將)으로서 전열을 수습하고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600년(선조 33)에 충청수사 · 수원부사 · 경상부사를 역임하였다. 1604년(선조 37)∼1608년(선조 41)까지 전라방어사 · 수원부사 · 함경병사(咸鏡兵使)에 자원했으나 임명되지 않았으며 그 후 자헌대부 완천군(完川君)에 증직되었으며 포도대장 훈련대장 겸 도총관을 10년간 역임하다가 1611년(광해군 3) 9월 2일에 58세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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