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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원군(관직)묘

(공신) 덕풍부원군 이순신 [충무공], 정경부인 상주방씨 -덕수이씨-

by 보현당 2014.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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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풍부원군 충무공 이순신

 

조선의 명장.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병조 참의(兵曹參議) 거의 증손, 정(貞)의 아들. 한양 출신. 1576년(선조 9) 식년무과(式年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함경도의 동구비보 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 수군 만호를 거쳐 1583년 건원보 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 1585년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 1589년 선전관(宣傳官)·정읍 현감(井邑縣監)을 역임하는 등 미관말직(微官末職)만을 지내다가, 1591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승진, 좌수영(左水營:麗水)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전력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초로 옥포(玉浦)에서 적 수군 선견부대 30여척을 격파, 이어 사천(泗川)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13척을 분쇄, 당포(唐浦)에서 20척, 당항포(唐項浦)에서 1백여 척을 각각 격파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품(陞品)되고 7월 한산도(閑山島)에서 적선 70척을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다시 가또오(加藤嘉明)의 수군을 안골포(安骨浦)에서 격파하고 9월 적군의 근거지 부산에 쳐들어가 1백여 척을 부수고,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의 적 수군을 궤멸(潰滅),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本營)으로 삼고, 그후 최초의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에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 수군의 전진을 막아 왜군의 작전에 큰 차질을 초래케 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군사훈련·군비확충·피난민 생업의 보장·산업장려 등에 힘썼고, 1597년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다가 정탁(鄭琢)의 변호로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했으나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원균이 참패하자 삼도 수군통제사에 재임,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鳴梁)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부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다음해 고금도(古今島)로 진을 옮기고 철수하는 적선 5백 척이 노량(露梁)에 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陳璘)의 수군과 연합, 적군을 기습하여 혼전(混戰) 중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충성심이 강하고 전략에 뛰어난 용장(勇將)으로서 임진왜란 중 싸움마다 승리했으며, 적 수군의 기세를 꺾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했고, 곡창 지대 전라도를 방어함으로써 군량미 확보에 만전를 기하는 등 위기에 처한 국가를 지탱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시조(詩調)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 선무공신(宜武功臣)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追封), 좌의정에 추증(追贈),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장지(葬地)는 아산(牙山)의 어라산(於羅山),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文)이 건립되었다. 충무(忠武)의 충렬사(忠烈祠), 순천(順天)의 충민사(忠愍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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