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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소평(昭平) 정미수(鄭眉壽) 신도비명(神道碑銘)

by 보현당 2016.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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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평(昭平) 정공(鄭公) 신도비명(神道碑銘)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 의정부우찬성 영경연사 판의금부사(議政府右贊成領經筵事判義禁府事)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증시(贈諡) 소평(昭平) 정공(鄭公)의 신도비명 : 서문(序文)을 아울러 기록하였다.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행한성부판윤(行漢城府判尹) 진천군(晉川君) 강혼(姜渾)은 비문(碑文)을 짓고,

통덕랑(通德郞) 예조정랑 겸 승문원교리(禮曹正郞兼承文院校理) 김희수(金希壽)는 비문의 글씨를 쓰다.

 

정덕(正德) 임신년(1512, 중종 7) 415일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공(鄭公)이 병으로 사망하였다. 부음(訃音)을 듣고 3일 동안 조시(朝市)를 정지하였으며 부증(賻贈)은 더함이 있었다. 81일에 양주(楊州)의 관할인 건천리(乾川里)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으니 예장(禮葬)이었다.

()의 이름은 미수(眉壽), ()는 기수(耆叟)이며, 해주(海州) 사람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이(), 벼슬이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과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정도(貞度)이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충경(忠敬)으로, 벼슬이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아버지의 이름은 종()으로, 문종(文宗) 임금의 따님인 경혜공주(敬惠公主)에게 장가들어 양녕위(陽寧尉)가 되었는데, 세조 임금 초기에 죄를 짓고 벌을 받아 공주와 함께 광주(光州)에 유배(流配)되었다가 거기서 공을 낳았다. 양녕위가 사망하자 공주를 경사(京師)로 불러들여 돌아오게 하니, 공의 나이는 10세에 공주를 따라서 궁중(宮中)으로 들어갔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기량(氣量)이 숙성하여 성상(聖上)께서 그를 사랑하였다. 그래서 선릉(宣陵 : 성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시종(侍從)하라는 명을 받으면 여러 달이 지나도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

이미 장성하여서 처음으로 벼슬을 얻어 돈녕부직장(敦寧府直長)이 되었다. 그러나 공주가 병을 앓아누우니 공은 일찍이 검루[黔婁 : 일생 동안 벼슬하지 않고 숨어 산 노() 나라의 사람]와 같이 벼슬을 버렸다. 공주가 사망하자 슬픔으로 몸을 손상시켜가며 예법(禮法)을 다하였고, 복제(服制)를 마치고 나서야 다시 옛 관직으로 돌아왔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었는데, 공은 명령을 잘못 내린 일로 의금부(義禁府)에서 국문(鞫問)을 받았다. 율관(律官)이 율문(律文)의 팔의조(八議條)에서 황가(皇家 : 임금)의 단문[袒免 : 시마(緦麻) 이하의 복()에서, 두루마기 따위의 웃옷의 오른쪽 소매를 벗고 머리에 사각건을 쓰는 상례(喪禮)] 이상의 친족(親族)’이라는 말에 근거해서 공을 의친(議親)으로 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의 목에 칼[項鎖]을 씌우려고 하며 율관이 말하기를, “율문에서 황가라고 말한 것은 대체로 당대(當代)의 선왕(先王)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너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며, 거기서 단문이라고 말한 것은 대체로 동성(同姓)과 이성(異姓)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너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하였다. 그래서 공은 옥()에 있으면서 소장(疏章)을 올렸는데 그 소장의 대략에, “율문에서 황가라고 말한 것은 통틀어 한 시대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단문이라고 말한 것은 동성으로써 복()이 없는 친족을 가리키는 것이며, 거기에서 이상(以上)이라고 말한 것은 동성과 이성으로써 복()이 있는 친족을 겸하여 가리킨 것입니다. 율관이 다만 단문이 동성의 친족이 된다는 것만을 알고 이상(以上)이라는 두 글자가 친족의 관계가 아주 멀어져서 복()이 없는 친족만을 거론하고 친척(親戚)이나 외척(外戚)으로 복()이 있는 친족이 해당되는 것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에 당대만을 말한 것이라면 율문에 어째서 황가라고 통틀어 말하였겠습니까?” 하였다. 그가 말한 황가 ...분명하였다. 그의 식견(識見)은 정밀하고 자세하였으며 논의(論議)는 조리가 분명하고 밝았다. 그리고 참으로 국가의 체통(體統)과 관계되는 일이었으므로 소장을 들여서 대신(大臣)에게 의논하도록 명하니, 모두들 말하기를, “아무개의 말이 지당합니다.”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예조(禮曹)에 내려서 정법(定法)으로 삼았다. 얼마 안 되어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승진되었다. 그때에 종녀(宗女) ...모두 말하기를, “고신(拷訊)을 하여 자복(自服)을 받아 대벽(大辟 :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공만이 홀로 말하기를, “아무개는 태종(太宗) 임금의 손녀(孫女)이므로 팔의(八議 : 형벌을 덜어 주던 여덟 가지 조건)에 따라 마땅히 용서해야 사람입니다. 또 그의 죄범(罪犯)이 국가와 관련된 것이 아니므로 이제 고신을 없애고 증거에 근거해서 정죄(定罪)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은혜와 법률(法律)이 모두 행해질 수 있게 한다면 아마도 사체(事體)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성상께서 끝내 죄를 묻지 않고 이씨(李氏)에게 죽으라는 명을 내렸다. 그때 우승지(右承旨) 한언(韓堰) 등이 성상의 물음에 대답하며 성상의 뜻을 거슬렀으므로 그 일을 사헌부(司憲府)에 내렸다. 그래서 추문(推問)하고 죄를 다스린 뒤에 아뢰었는데, 공이 마침 그 일을 고하는 자리에 있었으므로 그 일에 대해서 듣고 홀로 아뢰기를, “인군(人君)이 일을 처리할 때에는 반드시 널리 뭇사람들의 의견을 물어서 옳은 일이라고 말한다면 그대로 따르되, 혹시 마음에 맞지 않는 말일지라도 죄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권언 등이 비록 잘못 대답하였다고 할지라도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조정(朝廷)에서는 공의 말이 옳다고 여겼으나 끝내는 사섬시첨정(司贍寺僉正)으로 좌천(左遷)되었다. 그래서 당시의 의논이 그 일에 대해 비난하였다. 얼마 안 되어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으로 옮겨졌다가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인천부사(仁川府使)가 되었다.

공은 천성적으로 조용한 성품이어서 오직 서적(書籍)을 읽는 것으로 스스로 즐거워하였으며, 정사(政事)는 공평하게 처리하고 송사(訟事)는 이치에 맞게 잘 다스렸으므로 온 경내가 편안해하였다. 갑인년(1494, 성종 25)에 성종 임금께서 승하(昇遐)하시니, 산릉(山陵)에 동역관(董役官)으로 차정(差定)되어 나갔다가 포상(褒賞)으로 당상관(堂上官)에 승진되고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가 소환되어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임명되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객사(客舍)에 보관되어 있던 서책(書冊)을 훔쳐 팔다가 형조(刑曹)에 잡혀왔는데, 죄가 장만(贓滿 : 훔친 물건을 통산하여 사형에 처할 만한 최고 액수에 달하는 것)에 해당하므로 죽여야 마땅하다고 조정에서 아뢰기를 마치자 공이 홀로 ......돈과 곡식을 훔친 자는 마땅히 사형시켜야 하지만 서책은 바로 학문을 일으키는 도구이고 훔쳐서 팔아먹은 자의 사정도 딱하므로 그에게 극형(極刑)을 시행하는 것에 대해 신()은 적이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성상께서 그의 말에 따라서 사형을 면해주라고 명하였다.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다. 얼마 안 되어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올라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가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바뀌어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가자(加資)되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가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옮겨졌다. 갑자년(1504, 연산군 10)에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으로 옮겨졌다가 품계를 뛰어넘어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제수되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하였다. 그때에 살육(殺戮)이 끊이지 않아서 어른이나 아이나 모두 두려워하였다. 공이 조옥(詔獄 :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신문하거나 가두는 것)을 살피고 결단해야 할 때가 되어서는 반드시 ...자가 있었고, 그 나머지 온전히 살아난 자도 많았다. 병인년(1506, 연산군 12)에 우찬성(右贊成)에 승진하였다. 이해 9월에 대신(大臣)들과 나라의 중흥(中興)을 도와 영화롭게도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이 되었고, 관질(官秩)이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군()에 봉()해진 것이 위의 기록과 같았으며, 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고, 할아버지는 찬성(贊成)에 추증되었다. 정묘년(1507, 중종 2)에 사건에 연루되어 울진현(蔚珍縣)으로 귀양을 갔다가 얼마 안 되어 성상께서 그의 원통함을 아시고 불러서 관훈(官勳)을 예전과 같이 회복시켜 주었다. 공은 평소 맑고 여윈 모습으로 자족(自足)하였으며, 한가하게 거처할 때는 방에서 도서(圖書)와 함께 수양하며 담담하게 보냈다. 사람됨은 넓고 고아(高雅)하며 옛 것을 좋아하였으나 이른 나이에 부귀했던 집안이 몰락하자 서책을 볼 뜻을 꺾어버렸으나 이미 문장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그래서 여러 차례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재주와 식견으로 명망(名望)이 있었으므로 몸이 세상에서 중하게 되어 끝내는 작위(爵位)가 매우 융성한 데까지 이르렀으니, 문벌(門閥)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부인은 대대로 이어져온 명망이 높은 가문으로 전의군(全義君) 이덕량(李德良)의 딸이다.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족성(族姓)의 조카인 정승휴(鄭承休)로 후사를 삼았다. 나 혼은 공과 일찍부터 지기(知己)로서 붙어 다녔었다. 그런데 지금 정승휴의 부탁이 있으니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어서 이에 명문(銘文)을 쓰노라.

명문에 이르기를,

 

문덕(文德)을 지니신 문묘(文廟 : 문종)시여!

()은 그분의 외손(外孫)이라네.

...의 후손으로는

미수(眉守)만이 남았다네.

규장(珪璋) 같이 훌륭한 인품의 자질로

내면은 맑고 외모는 수려하였네.

시서(詩書)로써 문장을 이루어

그 성취한 것이 컸다네.

약관(弱冠)에 조정(朝廷)에 올라

이룩한 것이 더욱 무성하였네.

추관(秋官 : 형조)에서 옥사(獄事)를 다스리고

백부(栢府 : 사헌부)에서 임금께 간쟁(諫諍)하였네.

그 의론(議論)이 꼿꼿하고 굳세니

경중(輕重)이 그에게 달려있었네.

국운(國運)이 비색(否塞)해져서

아무 일 없이 모두들 죄에 걸렸다네.

공도 그때 형벌을 받을 처지에 놓였으나

여러 차례 그 갇혔던 곳에서 살아났다네.

평생 동안 축적한 것은

계획을 세워 시행한 데에 나타났다네.

우리나라의 흥기하는 국운을 도와서

이름이 공신록(功臣祿)에 올랐다네.

지위와 명망이 높이 빛났으니

이것은 나로부터 불러들인 것이었네.

현안[玄晏 : 황보밀(皇甫謐)]과 같이 수척하였고

백도[伯道 : 등유(鄧攸)]와 같이 후사(後嗣)가 없었다네.

또 장수(長壽)할 수 없었으니

실로 그것이 온전하기 어렵다네.

영원히 후세에 전하고자 하여

내가 여기 이 묘소에 명문(銘文)을 쓰노라.

 

정덕(正德) 8년인 계유년(1513, 중종 8) 9월 일에 처()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가 비석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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