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찬성집현전대제학(左贊成集賢殿大提學) 증영의정 시정도공(贈領議政 謚貞度公) 신도비명(神道碑銘)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집현전대제학 겸 판중군도총제부사(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 集賢殿大提學 兼判中軍都摠制府事)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시정도(贈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謚貞度) 정공신도비명병서(鄭公神道碑銘竝序)
묘앞에 비를 세우는 것은 훌륭한 업적을 드러내고 혼령이 다니는 길을 장식하기 위함이니 옛부터 이름이 높고 공적이 세상에 뛰어난 사람은 모두 비를 세워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우리 선조 정도공(貞度公)의 묘소에 비가 없으니, 이는 선대에 미처 세울 겨를이 없었던지 혹은 후일을 기다린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아름다운 행실과 뛰어난 업적은 국승에 실려 있고 또 사람들에게 전해져 오고 있으니, 비를 세우는 것이 공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국승에 실린 것은 감춰져서 잘 드러나지 않고, 사람들에게 전해져 오는 것은 시일이 오래되면 될수록 더욱 없어져 버린다. 불초한 후손들이 이를 염려하여 석공을 불러 돌에 새겨서 길이 후세에 전하려고 하였으나 연대가 오래되고 집안의 기록도 없어져서 공의 공적과 행적을 증거할 만한 것이 없었다. 다만 제문과 시문, 집안 여러 어른들의 간략한 기록등을 근거로 그 개략적인 것만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공의 성(姓)은 정(鄭)이고 이름은 역(易)이며, 자는 순지(順之) 호는 백정(栢亭)으로 본관은 대녕(大寧 :황해도 해주의 옛 명칭)이다. 윗대의 조상인 숙(肅)은 고려 신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법정랑(典法正郞)을 지냈고, 조부 언은 소부소윤(少府少尹)을 지냈는데 이조판서를 증직받았다. 부친 윤규(允珪)는 판예의사사(判禮儀司事)를 지냈으며 찬성을 증직받았다. 양대에 추증을 받은 것은 공이 귀하게 된 까닭이다. 모친은 경주설씨(慶州薛氏)로 대사성 문우(文遇)의 딸이며 홍유후(弘儒侯) 총(聰)의 후손이다. 공은 천성이 간결엄정하고 기질이 순박돈후하며, 경서 공부를 근본으로 하고 문장를 이루어 당세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홍무(洪武) 계해년 문과에 태종대왕과 함께 합격하였는데, 서로 마음이 맞아 매우 기뻐하였다. 태조가 개국할 때 당시의 뛰어난 선비들이 마음을 돌려 협력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공은 두문불출하고 병을 치료하면서 공명을 구하는 데는 태연히 뜻을 두지 않았다. 헌묘(獻廟: 태종)가 공의 이런 몸가짐을 매우 아름답게 여기어 친히 문병을 하면서 혼인을 약속하고 서로 돕는 뜻으로 권유하였다. 이에 공은 특별한 대우에 감격하여 비로소 나와 명을 받들어 임금을 잘 보필하여 건국초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일찍이 부모 의 봉양을 위해 염주(鹽州)에 잠시 벼슬을 하였는데 제일 먼저 유학에 의한 교화를 주장하였는데 고을 백성들이 공을 공경한 내용이 여지지(輿地誌)에 실려 있다.
이때부터 높고 중요한 자리를 두루 거치면서 지위와 명망이 더욱 높아졌다. 사간원과 사헌부의 장관이 되어서는 바른 명성이 드러나서 풍속과 기강이 바르게 되고 한성의 장관과 사법관이 되어서는 정사가 맑아지고 재판이 바르게 되었으며 두 곳에서 지방장관을 지낼 때는 위엄과 은혜를 함께 베풀었으며, 여러 조(曹)의 판서가 되어서는 크고 작은 일들을 잘 거행하였으며, 예문관제학이 되어서는 선비들의 기대에 잘 부응하였다. 왕실과 연이은 혼인으로 집안의 바른 법도가 가장 잘 드러났으며 사대의 임금을 섬김에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절개를 지켜 은총이 더욱 많아지고 복록이 함께 갖추어졌다. 내외 자손 십여 명이 벼슬을 하니 좌우에서 칭찬하고 세상에서 부러워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공은 집안이 번성해짐을 무척 염려하여 더욱 스스로 겸손하니 사람들이 이것을 더욱 아름답게 여겼다.
영묘(英廟 : 세종)가 바야흐로 공에게 의지하여 좋은 정치를 이루고자 했으나, 불행히 중풍에 걸려 시행하지 못하고 홍희(洪熙) 을사년 정월 이십육일에 돌아가셨으니 벼슬은 의정부좌찬성·집현전대제학에 그쳤다. 부음이 전해지자 임금이 몹시 슬퍼하여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예에 따라 부의를 보냈다. 영의정부사를 증직하고 시호를 정도(貞度)라 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지냈다. 그 제문에 이르기를 덕성이 돈독중후하고 그릇과 도량이 깊고 크다고 한 것은 천부적인 공의 성품이 두터움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며, 경서(經書)에 뜻을 독실히 하고 효제(孝悌)를 힘써 행하였다고 한 것은 공이 수양한 실제를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 온화하고 겸손하면서 지조가 있느며 검소하여 호화스럽지 않다고 한것은 공이 간략함으로서 검소했다는 것이며, 시의를 잘 알고 경제에 재주가 있다함은 공의 재주가 세상에 쓰이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안으로 다스림을 도운 것은 조정의 정책에 참여하여 보좌한 공이 많다고 하였으며, 밖으로 일을 맡아 처리한 것은 중국에 사신가서 훌륭히 임무를 완수한 업적이 있다고 하였다. 나라의 주석이 되고 진신의 모범이 되며, 훌륭한 신하가 돌아가니 충의있는 사람이 없다며 제문을 끝맺은 것은 공이 살았을 때 두텁게 의지함과 죽었을 때 깊이 슬퍼함을 나타낸 것이다.
아! 열 줄의 제문은 모두 사실에 근거한 말이 아님이 없으니 한 글자의 칭송이 화려하게 꾸미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다. 우리 선조의 덕행과 공적의 아름다움, 관작과 문벌의 번성함을 수백 년 뒤인 지금도 가히 상상할 수가 있다. 또 시호를 내리는 법에 청렴결백하며 절조를 지킨 것을 정(貞)이라 하고, 마음이 능히 의를 절제함을 도(度)라고 하니, 곧 이 정도(貞度) 두자는 공이 수립한 공적을 더욱 증명하는 것이다.
부인 정숙부인(貞淑夫人)은 영가권씨(永嘉權氏)로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사종(嗣宗)의 딸이며, 삼중대광(三重大匡) 화원군(花原君) 중달(仲達)의 손녀이고,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벽진(碧珍) 이군상(李君常)의 외손녀이다. 부덕과 규범이 당시 부인들의 으뜸이었다. 부인은 공보다 사년 뒤인 무신년 삼월 팔일에 돌아가셨는데, 공의 묘에 부장(祔葬)하였다. 묘는 처음에 고양(高陽) 봉현(蜂峴)에 있었는데, 천순(天順) 정축년에 경릉(敬陵: 세조의 장자 덕종의 능)의 자리로 지정되어 다음 해 봄에 나라에서 장례를 하면서 땅을 주어 이장하였으니 바로 과천 백석동 동남쪽을 향한 언덕이다. 이남삼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충경(忠敬)은 형조참판을 지냈으며 좌의정을 증직받았다. 둘째 충석(忠碩)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큰딸은 태종의 둘째 아들 효녕대군 보(補)에게 시집갔으며, 둘째 딸은 부사 이계장(李繼長)에게 시집갔고, 세째는 판서 권준(權蹲)에게 시집갔다. 참판은 여흥민씨(驪興閔氏) 목사 호덕(好德)의 딸에게 장가들어 일남오녀를 두었다. 아들 종(悰)은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에게 장가들어 영양위(寧陽尉)를 봉받았다. 맏딸은 풍저창부사 기축(奇軸)에게 시집갔으며, 둘째는 사직 김영(金瑛)에게 시집갔으며, 세째는 세종의 여덟째 아들 영응대군 담(琰)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신석돈(申碩敦), 반석보(潘碩輔)에게 각각 시집갔다. 동지는 연일정씨(延日鄭氏) 참의 종성(宗誠)의 딸이며, 포은선생 몽주(夢周)의 손녀에게 장가들어 육남삼녀를 두었다. 맏아들 침(忱)은 참의이고, 둘째 흔(忻)은 집의이고, 세째 담(憺)은 현감이고, 네째 변(忭)과 다섯째 연(憐)은 모두 생원이고, 여섯째 염(恬)은 현감이다. 맏딸은 판서 이승소(李承召)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서령(署令) 진유(陳猷)에게 시집갔고, 세째는 부사 김영추에게 시집갔다.
각파의 후손들은 모두 보첩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는 다 적지 않는다. 종가 직계외에는 다만 대소과에 합격하거나 관직과 증직이 있는 사람만 기록하였다.
증손 미수(眉壽)는 우찬성이며 정국공신 해평부원군에 책봉되었고 시호는 소평(昭平)이다. 유경(有慶)은 주부, 연경(延慶)은 부사로 증(贈)승지, 흥경(興慶)·수경(守慶)·문명(文明)은 군수, 문우(文遇)는 만호, 희경(熙慶)은 현감, 윤경(胤慶)은 참봉이다.
현손 승휴(承休)는 도사(都事)로 증(贈)찬성 해림군, 수경(守慶)의 아들인데 소평(昭平)공의 후사가 되었다. 희량(希良)은 봉교(奉敎)를 지냈으며 호는 허암(虛菴)이다. 희검(希儉)은 증(贈)참판, 희신(希信)은 우후, 홍도(弘道)는 정랑, 순(淳)은 현감이고, 영보(英輔)는 생원이다.
오대손 원희(元禧)는 감찰로 증(贈)참판 해녕군, 언효(彦孝)는 판관, 언복(彦福)은 생원, 언기(彦箕)는 부장, 언의(彦懿)는 군수이다. 육대손 흠(欽)은 판관으로 증(贈)판서 해성군, 용(鎔)은 증(贈)참판, 감(鑑)은 정랑, 연(淵)은 주부, 척(惕)은 승지, 신(愼)은 정, 핍은 증(贈)승지, 찬은 직장, 지춘(之春)은 첨지로 증(贈)참판이다. 칠대손 효준(孝俊)은 지돈녕 해풍군으로 다섯 아들이 문과에 합격하여 현종이 품계를 올려주고 해마다 쌀을 보내어 총애하였다. 승(勝)은 승지 증(贈)판서, 등(騰)은 찰방, 후준(後俊)은 현감, 호학(好學)은 군수, 광전(光前)은 봉사 증(贈)승지, 문승(文升)은 봉사, 문부(文孚)는 참판인데 북관을 수복한 공으로 증(贈)찬성, 문부(文富)는 증(贈)참의, 문귀(文貴)는 판관, 지익(之益)은 정(正), 문익(文益) · 수익(受益) · 우익(友益)은 진사, 선계(善繼)는 직장이다.
팔대손 식(植)은 필선 증(贈)참판 해원군, 익은 좌참찬, 석(晳)은 참판, 박(樸)은 대사헌, 적(樍)은 장령 증(贈)도승지, 백(栢)은 봉사, 직은 직장, 도창(道昌)은 별좌 증(贈)승지, 도형(道亨)은 사예, 도영(道榮)은 도사 증(贈)승지, 도연(道沇)은 주부, 대일(大逸)·대영(大榮)은 진사, 대형(大亨)은 동지, 원(遠)은 군수 증(贈)참판, 창조(昌祖)는 판관, 유징(有徵)은 장령, 유빈(有彬)은 학록, 유증(有曾)은 무과에 합격했다.
구대손 중휘(重徽)는 참판 해흥군, 중창(重昌)은 부사, 중만(重萬)은 정랑, 중태(重泰)·중기(重基)·석구(碩耉)는 군수, 중윤(重胤)·중조(重朝)는 현감, 면(勔)은 승지, 번·중규·중희(重熙)·중해(重海)·중보(重寶)는 진사, 후심(後諶)은 동지, 중국(重國)·후무(後武)·후길(後吉)은 선전, 후영(後榮)은 영장, 색은 무과이다.
십대손 이녕(以寧)은 일찍 죽었고, 지녕(志寧)은 참봉, 일녕(一寧)은 현령, 태녕(泰寧)은 군수, 항녕(恒寧)은 부장, 한주(翰周)는 현령, 필주(弼周)는 좌랑, 우주(羽周)는 무과, 익주(翊周)는 정랑, 상주(翔周)는 부사, 후주(後周)는 교관, 휘주(徽周)는 학유, 창주(昌周)는 첨정, 삼(杉)은 주부, 덕녕(德寧)·시녕(始寧)·관하(觀夏)·진주(鎭周)·희주(熙周)·집(楫)·량(樑)·탁(鐸)은 진사, 진주(震周)는 무과이다. 십일대손 운희(運熙)는 지녕(志寧)의 아들로서 이녕(以寧)의 후사가 되었으니 바로 종손이다. 운흥(運興)·진설(震卨)은 진사이다.
아! 공의 자손은 많고 많아서 세월이 갈수록 더욱 번창하니, 덕을 베풀고 복을 쌓은데 대한 보답이 아니겠는가. 옛말에 이르기를 ‘뿌리가 튼튼하면 가지가 반드시 무성하고 샘이 깊으면 물이 멀리까지 흐른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옳다. 우리 선조의 문장과 덕행, 출처와 사업은 빛나고 뛰어나서 후세에 전할 만한데, 나처럼 아득한 후손은 이미 시대가 너무 멀고 듣고 본 것도 없어 하찮은 솜씨로 만의 하나도 제대로 형용할 수 없었다. 만약 조상의 의리를 밝힘에 잘못이 있다면 불초의 책임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옷깃을 여미며 두 번 절하고 명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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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리 선조는 하늘이 내신 분
고상한 인품과 아름다운 바탕으로 태산북두처럼 명망이 두터웠네.
출처는 의리에 따라 때로 그치고 행하여
임금되기전 옛친구의 정 신하되곤 기쁨 새로웠네.
몸가짐은 유학에 따르고 나랏일은 충성을 다하여
사림의 종장(宗匠)되고 조정의 모범됐네.
왕실의 인척되어 고락을 나누었고
삼달덕을 갖추고, 지위는 이공일세.
존귀할수록 삼가하여 마음은 더욱 겸손하니, 두텁게 쌓고 넓게 베품이라.
누대에 벼슬하여 교목같은 훈신집안 길이 자손에게 이어지니 누가 이를 주었는가.
백석동 공의 묘소 큰비석에 명을 쓰니, 임금이 내린 제문 일월처럼 빛나도다.
공의 평생을 이로써 알 수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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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명숭정(皇明崇禎) 기원후(紀元後) 81년 무자 6월 일에 세우다.
십대손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종부시주부(行宗簿寺主簿 謹) 익주(翊周)는 삼가 글을 짓고
구대손 통훈대부(通訓大夫) 행형조정랑(行刑曺正郞) 중만(重萬)은 글을 쓰고 이울러 전액(篆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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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묘앞에 작은 묘갈만 있고 신도비가 없었다. 장은 아버지 승지공 면(勔)께서 일찍이 이를 한스럽게 여기고 여러 집안사람들과 제를 하기로 약속하였다.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마다 남는 재물을 모아 비를 세우기도 하였으나 뜻을 이루기도 전에 불행히도 먼저 돌아가셨다. 그 둘째 아들 계주(啓周)와 종자 현령 한주(翰周)가 뒤를 이어 일을 이루려고 하였지만 도중에 현령이 또 다시 갑자기 돌아가셨다. 계주(啓周)가 계속하여 현령의 아들 진설(震卨), 종가의 중만(重萬), 지녕(志寧)과 함께 정성을 다하여 일을 맡아 비로소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가문의 행복이 이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 익주(翊周)는 일찍이 아버지와 형을 따라 말석에서 논의에 참여하였는데, 지금에야 일을 마치게 되니 서글픈 마음을 이길 수 없어 일의 전말을 간략히 비문뒤에 서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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