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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지돈녕부사 해풍군 정효준 신도비

by 보현당 2016.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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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 자헌대부 지돈녕부사 해풍군 정공신도비명과 서문

 

보국숭록대부 행판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 전서(篆書).
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겸예문관제학 강백년(姜栢年) 지음.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오위도총부부총관 오심(吳深) 글씨.

공은 을사년 6월 12일 89세로 자택에서 사망했다. 품계는 자헌대부이고 관직은 지돈녕부사였으며 해풍군의 호를 가지고 있었다. 부음이 오자 나라에서는 조회를 거두고 부의를 보냈으며 예관을 보내 위문하고 제사를 지냈다.석 달 뒤 8월에 양주 해평리(楊州海坪里) 부갑(負甲: 서향)의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당시 지문을 내가 지었다. 근래 공경의 예로써 묘 앞길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 부석(趺石)이 이지러졌으므로 아들 판서공 형제가 또 내게 글을 청해 새기고자 했다. 아! 공은 내게 선배가 되는데 일찍부터 나를 아껴주었고 만년에 또 공의 부자와 어울리게 되어 공의 평생에 대해 나만큼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행장을 참고하여 서술한다.
공의 이름은 효준(孝俊)이고 자는 효우(孝于)이다. 정씨는 해주의 대성(大姓)으로 위 조상에 숙(肅)이라는 인물이 고려 때의 명신이었고, 우리 조선에 들어와 찬성을 지낸 역(易)은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 태종과 세종 때에 이름난 대신이 되었다. 역의 아들 충경(忠敬)은 형조참판을 지냈고, 충경의 아들 종상(悰尙)은 문종대왕의 딸 경혜공주와 결혼하여 영양위에 봉해졌다. 영양위의 아들 미수(眉壽)는 재주가 뛰어났으나 과거를 보지 않았으므로 조정에서는 음관으로 관직을 내렸다. 그 때 단종의 비 송씨가 살아있을 때인데 외조카에게 제사를 지내게 해달라고 청했다. 성종이 딱하게 여겨 허락하고 이어 대대로 전하게 했다. 나중에 충성과 근면으로 공신에 책봉되어 해평부원군이 되었으며 다시 정씨 집안을 일으키게 되었다. 해평부원군이 바로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 승휴(承休)는 충훈부도사를 지내고 찬성의 관직과 해림군이라는 호를 추증 받았고, 조부 원희(元禧)는 감찰을 지내고 참판과 해령군을 추증 받았으며, 아버지 흠(欽)은 돈녕판관을 지내고 판서의 관직과 해성군이라는 호를 추증 받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추증을 받게 된 것은 공의 관직이 높아서 추은을 받은 결과였다.
공의 아버지 해성군은 효도와 공경이 지극하고 몸가짐이 엄격했으며 조상 과 단종에 대한 제사를 신중하고 깨끗하게 받들었는데 늙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집안 법도가 그렇게 전해 내려 온 지 오래된 것이다. 어머니 평산신씨(平山申氏)는 판서 점(點)의 딸로 선조 10년 3월 1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나이 일곱에 이미 글재주가 뛰어났다. 하루는 봄을 감상하는 글을 지었는데 사람을 놀라게 하는 글귀가 있는지라 외할아버지 판서공이 기특하게 여기고 애지중지하여 나중에 크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과거 시험장에서도 글을 잘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는데, 특히 병려체에 더욱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은 장원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들 말했다. 그러나 끝내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 친척들은 운이 좋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음관 관직을 주려고 했으나 공이 사양했다.
뒤늦게 무오년 사마시에 급제했는데, 당시 흉당들이 인목대비를 폐하려고 하자 공은 어몽염(魚夢濂), 정택뢰(鄭澤雷)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어몽염과 정택뢰가 귀양을 가게 되었으나 공은 오히려 꺾이지 않고 박안제(朴安悌)와 성균관에 들어가 흉론을 배척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이첨(李爾瞻)을 귀양 보내라는 상소를 올렸다. 흉당은 도리어 반대하는 사람들을 관직에서 내쫓았고 이이첨은 공의 이름을 벽에 적어놓고 걸려들기를 기다렸다. 공은 마침내 북관으로 나가 화를 피했다.
인조반정 뒤 지난날 절개가 있던 사람들이 차례로 관직에 오르게 되었는데 공만 유독 아무도 추천하는 사람이 없어서 맨 나중에야 효릉참봉에 제수되었다가 전생서봉사로 옮겨갔다. 을해년과 병자년에 연이어 부친상과 모친상을 당했는데, 공의 나이 이미 예순이었으나 예를 다해 상을 치렀다. 갑신년에는 자여찰방이 되었고 병술년에는 공신의 자손으로 품계가 올라 오위장과 첨지중추를 역임하고, 임진년에는 돈녕부도정으로 옮겼다가 병신년에 대시(大諡)로 품계가 오르고 습봉으로 해풍군이 되었으며 동지돈녕이 되었다.
공은 늦게야 아들을 얻었으나 사랑 때문에 가르침을 등한히 하지는 않았다. 여러 아들들이 모두 뛰어난 재주가 있고 열심히 공부해 십여 년 사이에 네 아들과 한 손자가 잇달아 과거에 급제하고 요직을 맡게 되었다. 관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들 부러워하고 감탄하며 말했다. “‘동백나무 한그루에 붉은 계수나무 가지가 다섯’이라는 옛말을 지금 다시 보게 되었다.” 임인년에 막내아들 적(樍)이 또 과거에 급제하니 대신들이 예조판서 김수항(金壽恒)과 함께 왕에게 아뢰었다. “다섯 아들이 과거에 급제한 일은 우리 조정에서 드문 일이고 순전히 문과에만 오른 것은 더욱 드문 일입니다. 지금 동지돈녕부사 해풍군 정효준의 아들 필선 식(植)과, 승지 익, 사간 석(晳), 장령 박(樸), 새로 급제한 적(樍), 다섯 사람이 문과에 급제했으니, 늙고 어진 신하의 순수하고 깊은 가르침이 있어서입니다. 온 세상을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는 문으로 하는 교화에 빛이 나는 일이니 마땅히 특전을 내려야 합니다.” 마침 익과 석이 차대(次對)에 입시하고 있었다. 왕이 익을 돌아보며 나이를 물었다. 익이 대답했다. “신의 부친이 올해 여든 일곱입니다.” 왕이 가상히 여기고 감탄한 지 한참 만에 품계를 건너뛰어 자헌대부로 올리고 해마다 쌀 다섯 섬을 내리라고 명하고, 이어 지돈녕부사에 제수했다. 공은 더욱 겸손해하며 아들들에게 타일러 말했다. “우리 부자는 이미 분수가 지나치다. 나라의 은혜는 갚기 어렵고 조상의 공업은 잃기 쉬우니 너희들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 아들들이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차례로 서울 가까운 곳의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자주 문안을 드리고 맛있는 반찬을 마련해 오면 공은 타이르며 말했다. “혹시라도 부모로 인해 하는 일을 등한히 하지 말라.”
복과 녹을 누리고, 자녀들을 잘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이 옛날 중국의 만석군(한무제 때 석분을 말한다. 아들 넷이 2천 석의 녹을 받고 자신이 또 2천 석의 녹을 받았으므로 만석군이라 불렀다)의 풍취가 있었다. 매년 봄 생일 때는 동갑 친구인 홍무적(洪公茂績), 김기국(金蓍國), 신계영(辛啓榮)과 함께 술을 나누며 즐겼다. 또 찬성 민형남(閔馨男)과 진솔회를 만들었는데 참석하는 공들이 모두 현명한 원로들과 덕이 높고 수염과 눈썹이 흰 노인들이었다. 술동이를 두들기며 흥이 오르면 공은 노래를 불러 화답하고, 아들들은 조복을 입고 술을 따라 올리며 장수를 빌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부러워하고 기뻐했다.
공은 평생 약 먹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나이가 여든이 넘어도 여전히 총명하여 남과 이야기 할 때 옛 일을 빠뜨리지 않고 꿰고 있었고, 젊었을 때 지은 글 가운데 전쟁으로 불타버린 것들을 다시 기억해 내 기록하기도 했다. 만년에 자신의 호를 낙만(樂晩)이라고 했는데, 가끔 글을 짓기는 했으나 다만 품은 정을 노래할 뿐 구태여 다듬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집이 쓸쓸했으니 공이라고 어찌 외로운 생각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아들들의 봉양이 지극하여 잠자리와 거처를 편안하게 해주고 듣고 보는 것을 즐겁게 해주니 편안하고 순조로워 세월가는 대로 내맡겼다.
공은 천성이 간결하고 솔직하며 겉은 따듯하고 속은 분명했다. 사람들과 사귈 때는 간격이 없이 가슴을 탁 터놓고 진정으로 대하며 그윽한 향기와 따스한 기운을 풍겼으므로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취하곤 했다. 집안에서의 행실은 지성이어서 나이 여든이 지난 뒤에도 조상의 제삿날이 되면 반드시 제계하고 엄숙한 몸가짐으로 몸소 제사를 받들고 다른 사람을 대신 시키지 않았으며 자매들이 돌려가며 제사를 지내게 하지도 않았다. 만약 집안이 가난하여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종형제가 있으면 제사를 지내게 해 주었으며, 가난한 친척을 보살필 때는 내 형편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모두 효도하고 우애하는 마음에 근본을 두고 미루어 간 것이었다.
첫째부인 전주유씨(全州柳氏)는 현감 영하(永賀)의 딸이고, 두 번째 부인 진주유씨(晋州柳氏)는 중광(重光)의 딸이며, 셋째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한부길(韓富吉)의 딸이다. 무덤은 모두 판서공의 무덤 아래 있다. 넷째 부인 정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는 경상우병사 진경(眞卿)의 딸이고 참찬 준민(俊民)의 증손녀이다. 전주이씨의 어머니 정부인 경주이씨(慶州李氏)는 동지 우(佑)의 딸로, 부인은 선조 30년 10월 10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정숙하고 덕이 있었으며 도량이 넓어 할머니 구부인(具婦人)이 사랑하고 기특히 여기며 말하곤 했다. “이 아이는 세상에 이름난 현숙한 며느리가 될 것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영리하여 둘째 오빠가 글을 읽으면 그 뜻을 풀어내곤 했다. 나이 열일곱에 공에게 시집오니 판서공이 보고 기뻐하여 말했다. “이 며느리가 우리 집안을 흥하게 할 것이다.” 공이 일찍이 세 번 장가를 들었으나 그 때마다 상처하여 혼자 몹시 외롭게 지내다가 부인이 들어 온 뒤로 잇달아 다섯 아들을 두어 집안이 날로 번성해졌다. 사람들은 공이 좋은 짝을 만난 것과 착한 부인에 훌륭한 아들들로 만년의 복을 누린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부인은 안살림을 맡은 지 50년 동안 하는 일과 하는 말이 모두 예의와 법도를 따랐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존경하며 집안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냈다. 조상을 받드는 일에 더욱 정성을 다하여 음식 만들고 상 차리는 것을 몸소 하며 수고로움도 잊었고, 비복들을 부리고 이웃과 마을 사람들을 대하는 데도 은혜와 의리를 겸하여 다했다. 사람의 도리를 밝히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이치를 아는 군자도 미치지 못할 점이 있었다. 여러 아들들이 차례로 글을 배웠는데 부인이 직접 책을 주고 때로는 매를 때리기도 하며 조금도 사랑에 치우치는 일이 없었다. 또 전실부인이 낳은 자식을 내가 낳은 자식보다 더 알뜰히 보살폈다. 자녀들이 과거에 급제하자 공이 특별히 노비를 준 일이 있었는데 부인이 말했다. “자라서도 과거에 오르지 못한 자식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낳은 자식만 편애하면 내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항상 아들들에게 훈계하면 말하곤 했다. “너희들의 영화가 이미 분수에 넘었으니 내게 맛있는 음식을 주려고 생각하지 말라.” 공이 만년에 식사량이 너무 적은 것을 보고 손수 국을 끓이고 죽을 만들어 때에 맞춰 내놓았다. 공보다 한 해 먼저 갑자년 12월 22일 나이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을사년 양주의 선영에 임시로 모셨다가 그 이듬해 공과 합장했다.
자녀는 다섯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두 딸은 전주유씨 부인의 소생이다. 아들 식(植)은 필선, 익은 판서, 석(晳)은 참판, 박은 감사, 적(樍)은 장령이고, 딸들은 목사 오빈과 유학 성후석(成後奭), 도사 남성훈(南聖熏)에게 시집갔다. 식은 응교 엄성(嚴惺)의 딸과 결혼하여 4남 4녀를 두었다. 아들 중휘(重徽)는 도승지, 중창(重昌)은 현감, 중원(重遠)은 일찍 죽고, 중만(重萬)은 진사이며, 딸들은 부사 임상원(任相元), 이선징(李善徵), 이만하(李萬夏), 허점(許坫)에게 시집갔다. 익은 제용감정 박심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3남 3녀들 두었다. 아들 중태(重泰)는 찰방, 중하(重夏)는 일찍 죽고, 중조(重朝)는 봉사이며, 딸들은 참판 오정창(吳挺昌)과 도사 김성최(金盛最)와 권두선(權斗璿)에게 시집갔다. 석은 도사 박수소(朴守素)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2남 2녀를 낳았다. 아들 중기(重基)와 규(規)는 모두 진사이고, 딸들은 이사상(李師尙)과 신필해(申弼諧)에게 시집갔다. 박은 광흥수 민여진(閔汝鎭)의 딸과 결혼하여 5남 4녀를 낳았다. 아들은 중재(重載), 중전(重戩), 중계(重誡), 중함(重諴), 중무(重茂)이고, 딸들은 박해(朴繲), 이숙(李橚), 이이만(李頤晩), 민언상(閔彦相)에게 시집갔다. 적은 판서 홍우원(洪宇遠)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중진(重鎭), 중구(重龜), 중민(重民)이고 딸은 무풍수 근(根)에게 시집갔다. 맏사위 오빈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필선 두헌(斗憲), 두선(斗宣)과 두성(斗宬)이고, 딸은 진사 유헌에게 시집갔다. 둘째 사위 성후석은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호(琥), 우(瑀), 연(璉)이고 딸들은 노서(盧序)와 고세태(高世泰)에게 시집갔다. 셋째사위 남성훈은 6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수명(壽明)과 극명(克明)은 진사이고 나머지는 서명(瑞明), 석명(錫明), 철명(哲明), 윤명(允明)이며, 맏딸은 허웅(許顒)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어리다. 내외 손자와 증손자, 현손자를 모두 합하면 백여 명 된다. 아! 대대로 커다란 경사를 맞는 것은 오직 적선을 했기 때문이다.
해주 정씨는 찬성공이 터를 다지고 해평군이 회복했으며, 해성군이 키워 공에게 이르러 넓히고 풍성하게 되었다. 높은 벼슬은 온 집안을 빛내고 문장과 학문은 무성하여 끊이지 않았다. 하늘이 보답하여 베푸는 이치는 실로 틀림이 없어서 판서공 형제가 잇달아 가문을 크게 빛내게 된 것도 부모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아아!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명왈(銘曰),

해주 정씨의 조상 수없이 많아
공이 태어나 훌륭한 자취 남겼네
올바른 의론 지켜 윤리 북돋우니
다시 남은 복 자손이 이어갔네
다섯 아들과 한 손자 문과에 올라
금띠 두르고 봉작 이어 녹을 받았네
선학과 신령한 거북 같은 골상
높은 산처럼 오래오래 즐거웠네
많은 자손들 속에 공이 장수하니
수많은 봉황 오동나무에 모인 듯
하늘이 내린 나이와 행복 누리니
고원의 소나무 푸르고 무성하네
큰 빗돌 세워 공의 무덤 알리니
드높은 이름 더욱 커지리라

숭정(崇禎)기원후 무오년 10월 일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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