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1924년 전라남도 신안에서 태어났다. 호적상 출생일은 1925년 12월 3일(음력)이다. 1950년 《목포일보》 사장이 되었고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3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63~1967년 민주당·민중당·신민당 대변인, 1968년 신민당 정무위원을 역임하였고, 19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朴正熙)와 겨루었으나 패배하였다. 그후 미국·일본 등지에서 박정희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가 1973년 8월 8일 도쿄(東京)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요원에 의하여 국내로 납치(김대중납치사건)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76~1978년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80년 초 정치활동을 재개하였으나, 같은해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5년 귀국하여 김영삼(金泳三)과 더불어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역임하였고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었고 1991년 9월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하여 공동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다시 낙선하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1993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1년 동안 연구활동을 하였고 1994년 귀국,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 당시 민주당의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의 막후인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1995년 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주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같은해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동교동계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총재가 됨으로써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1997년 10월 자유민주연합과의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끌어낸 뒤 같은해 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평화적 여야 정권교체를 이룩하였으며,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8년 12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중국 및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갖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다.
1999년 5월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6월에는 미국 경제 주간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하는 '아시아개혁을 주도하는 지도자 5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 1월 자유민주연합과의 내각제 개헌논의를 유보하고, 새천년민주당을 출범시켜 초대 총재에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또한 동아시아와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향상 그리고 50여 년간 지속되어 온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노력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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