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간공 지봉 이수광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시호는 문간(文簡). 병조판서 희검(希儉)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문화류씨이다. 16세 때 초시에 합격하였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20세에 진사가 되었고, 1585년(선조 18) 23세에 별시 병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으며, 27세에 성균관 전적을 거쳐 그 이듬해에는 호조와 병조의 좌랑을 지냈으며,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30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방어사 조경의 종사관이 되어 종군하였으나, 아군의 패배 소식을 듣고 의주로 돌아가 북도선유어사가 되어 함경도 지방의 선무활동에 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 35세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는데 그 해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또 명나라에서 중극전과 건극전 등 궁전이 불타게 되자, 그는 진위사로서 두번째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 때 명나라에서 안남(베트남)의 사신을 만나 화답하면서 교류하였던 사실이 주목된다. 39세에 부제학으로 <고경주역(古經周易)>을 교정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주역언해(周易諺解)>를 교정하였으며, 41세에는 <사기(史記)>를 교정하였다. 1605년(선조 38) 43세에 안변부사로 나아갔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와 1607년(선조 40) 겨울 다시 홍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1609년(광해군 1) 돌아왔다. 1611년(광해군 3)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주청하는 사절의 부사로 세번째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 때에 유구(琉球)사신과 섬라(타이)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을 듣고 기록하였다. 정국이 혼란하자 1616년(광해군 8) 순천부사가 되어 지방관으로 나아가 지방행정에 전념하였다. 57세에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수원에 살면서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되자 도승지 겸 홍문관 제학으로 임명되고 대사간 · 이조참판 · 공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25년(인조 3) 대사헌으로서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12조목에 걸친 <조진무실차자(條陳懋實箚子)>를 올려 시무를 논하여 당시 가장 뛰어난 소장이라는 평을 받았다. 1628년(인조 6) 7월 66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그 해 12월에 별세하였다. 그는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요직을 모두 지냈으며, 세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관료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 특히, 그의 활동 시기에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치르고, 광해군 때의 정치적 갈등과, 인조 때의 이괄의 난을 겪어 어려웠던 정국에 살면서도 붕당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언제나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입장을 지켜 그 시대의 성실하고 양식있는 관료요, 선비로서의 자세를 지켰다. 그러나 그에게서 가장 중요한 면모는 사회적 변동기에 새로운 사상적 전개방향을 탐색하고, 개척한 학자로서의 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그는 조선사회가 전기에서 후기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사회변화와 더불어 발생하게 될 실학파의 선구적 인물로, 사상사 내지 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것이다. 그가 두드러지게 활동하던 반세기 초기는 이미 16세기 후반에 있어 이황과 이이로 정점을 이루는 성리학의 이론이 성숙되었던 다음 시대로서 김장생·정구 등에 의해 예학(禮學)이 융성하게 일던 시기이다. 이와 같이 도학(道學)의 정통성은 확립되었지만, 임진왜란의 충격 속에 사회질서의 변화가 진행되었을 때는 사상적으로도 정통적 도학의 성리학적 관심에서 벗어난 새로운 요구가 대두되던 시기이다. 그것은 곧 한백겸의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에서 보여준 실증적 고증에 의하여 고대의 전제(田制)에 있어서 주자(朱子)의 견해도 추측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음을 밝혔던 사실이나, 남언경 · 이요 등 양명학의 이론에 호의를 가지는 태도의 출현을 들 수 있다. 이 때의 그의 사상적 성격을 분석하여 보면, 주자학을 존중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그 당시 주자학의 기본문제인 태극 · 이기 · 사단 · 칠정 등 성리학의 이론에 뛰어들지 않고, 심성의 존양(存養)에 치중하는 수양론적 문제를 학문적 중추문제로 삼고 있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비록 성리학의 이론적 분석이나 논변은 조선 후기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이러한 전통적 성리학파의 입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그의 철학적 기본문제가 심성의 이기론적 개념분석이 아니라 수양론적 실천방법의 탐색이라는 것은 그만큼 그의 철학이 관념철학을 벗어나 실천철학적 성격을 지니는 것임을 말해 준다. 그의 저술<지봉유설(芝峯類說)> 가운데 유도부(儒道部)에서 학문(學文) · 심학(心學) · 과욕(寡慾) · 초학(初學)·격언(格言)의 5항목으로 분류하고 있는 사실도 주자학에서 존중되는 도체(道體)의 문제나 성리학적 과제를 제쳐두고, 심성의 수양론적 관심 속에서 유학을 분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조진무실차자(條陳懋實箚子)>에서 정치의 효과를 이루지 못하고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모두 부실한 병 때문이라 지적하였고, 모든 일을 처리하는 관건은 성(誠)에 있으며, 성이 곧 실(實)임을 밝히고, 실심으로 실정(實政)을 행하고, 실공(實功)으로 실효를 거둘 것을 주장하면서 생각마다 모두 실하고, 일마다 실할 것을 요구하는 무실(懋實)을 강조하였다. 그의 무실론은 구체적 현실의 성이면서 동시에 도덕적 성실성의 요구이다. 성을 모든 것에 일관하는 원리로 삼고, 이 성의 현실적 실현을 추구하는 것은 실학정신의 근원적 사유방법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그는 “학(學)은 활쏘기와 같아서 과녁을 지향하는 것”이라 밝히면서, 학문의 입지와 지향하는 바가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도 진리의 기준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학문적 개방정신과 더불어 학문의 수양론적 기능에 대한 요구에서 “학문은 습(習)을 귀하게 여기며, 습을 통하여 숙(熟)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학습론을 엿볼 수 있다. 함양성찰(涵養省察)하는 수양의 과정이 곧 학습이요, 살아 움직이는 마음의 배양, 즉 성숙인 것이다. 그의 이러한 철학적 특성이 도학의 정통성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성리학의 이론적 천착(穿鑿)으로 나아가는 방향이 아니라 인격과의 구체적 실현을 추구하는 실학정신의 발휘로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66세로 세상을 떠난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수원의 청수서원(淸水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술로는 <지봉집(芝峯集)> 31권, 부록 3권이 있으며, <찬록군서(纂錄群書)> 25권이 있다고는 하나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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