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림군 이개윤의 딸을 의순공주로 삼고"
나라를 구한 비운의 공주 의순공주
- 의순 공주(義順公主) : 효종 원년 3월에 청나라 사신 파흘내(巴訖乃) 등이 가지고 온 칙서 가운데에 “귀국과 혼인하여 우의를 공고히 하고자 하니 왕의 누이나 딸 혹은 왕족이나 대신의 딸 중 재색을 겸비한 자를 뽑아 보내라.”고 하였으므로 생부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의 딸을 의순 공주로 가칭하여 섭정왕에게 보냈었다.
- 효종 3권, 1년(1650 경인 / 청 순치(順治) 7년) 3월 25일(무인) 2번째기사
혼인할 여자인 금림군 이개윤의 딸을 의순 공주로 삼고 상을 내리다
금림군 이개윤의 딸을 의순 공주(義順公主)로 삼았다. 개윤에게 가덕(嘉德)의 품계를 더하고, 비단과 미두(米豆)를 후하게 내렸다.
- 효종 3권, 1년(1650 경인 / 청 순치(順治) 7년) 4월 20일(계묘) 1번째기사
의순 공주의 호행사로 공조 판서 원두표를 삼다
영양군(嶺陽君) 이현(李儇)을 의순 공주(義順公主) 호행사(護行使)로 삼았는데, 현이 아비의 병을 이유로 사직하자 공조 판서 원두표(元斗杓)로 대체하였다.
- 효종 3권, 1년(1650 경인 / 청 순치(順治) 7년) 4월 22일(을사) 1번째기사
서교에 나아가 의순 공주를 전송하다
상이 서교에 행행하여 의순 공주를 전송하였다. 시녀 16인과 여의(女醫), 유모 등 몇 사람이 따라갔는데, 이를 본 도성의 백성들이 모두 비참해 하였다.
- 효종 6권, 2년(1651 신묘 / 청 순치(順治) 8년) 2월 18일(을축) 3번째기사
이시방과 정유성이 섭정왕의 왕위 찬탈 음모와 의순 공주의 거취를 알리다
“신들이 정명수(鄭命壽)에게 묻기를 ‘청사 네 사람이 띠고 온 일은 무엇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청주(淸主)의 생모를 존봉(尊封)하여 태후로 하고 또 본국의 세폐(歲幣)를 견감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조서를 반포하는 것이다.’ 하고, 또 비밀히 말하기를 ‘섭정왕이 살았을 때 은밀히 황제의 자리를 찬탈할 뜻을 품고 황포(黃袍)를 미리 준비하여 반역의 형상이 이미 드러난 데다가 또 그 사실을 고한 자가 있어서 청주가 크게 노하여 존호를 삭탈하고 태묘에서 축출하였으며 그 가산(家産)을 관아에 적몰하고 그 여인들은 제왕(諸王)에게 나눠줬는데, 의순 공주(義順公主)도 백양왕(百陽王)의 아들에게로 돌아갔다.’ 하였습니다.”
- 효종 6권, 2년(1651 신묘 / 청 순치(順治) 8년) 6월 3일(무신) 1번째기사
대신을 인견하고 외교·국가기강 문제·조세징수·지방 군사조직을 논의하다
두표가 아뢰기를, “의순 공주(義順公主)가 또 보로(甫老)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사람이 동국의 일을 주관한다 하니, 마땅히 안부를 물어야 할 듯합니다.”
- 효종 16권, 7년(1656 병신 / 청 순치(順治) 13년) 4월 26일(갑술) 2번째기사
의순 공주가 청나라에서 돌아오다
의순 공주(義順公主)가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 효종 16권, 7년(1656 병신 / 청 순치(順治) 13년) 5월 9일(정해) 1번째기사
호조에 명하여 의순 공주에게 매달 쌀을 지급하도록 하다
호조에 명하여 의순 공주(義順公主)에게 매달 쌀을 지급하여 그의 평생을 마치도록 하였다.
- 효종 16권, 7년(1656 병신 / 청 순치(順治) 13년) 윤5월 10일(정사) 1번째기사
간원이 사신으로 사사로이 딸을 돌려줄 것을 청한 금림군 이개윤의 치죄를 청하다
“의순 공주(義順公主)가 청나라로 간 것은 조정의 명령 때문이었으니 의순 공주가 돌아오는 것도 또한 반드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은 일의 체제를 생각하지 않고 조정을 업신여기며 사사로운 뜻에 끌려 멋대로 돌려달라고 청하였으니, 국법에 있어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전 호군 이행진(李行進)과 전 정(正) 이지무(李枝茂) 등은 못하게 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찬성하였으며 말할 때에도 또 망발이 많아 사신의 임무를 형편없이 수행하였으니 그들의 죄도 똑같습니다. 어찌 파직만 시키고 말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삭탈 관작하여 성문 밖으로 쫓아내소서.”
- 현개 7권, 3년(1662 임인 / 청 강희(康熙) 1년) 8월 14일(갑인) 4번째기사
상이 정원에게 하교하여 금림군의 딸의 초상에 쓸 물품을 넉넉히 주도록 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여 금림군(錦林君)의 딸의 초상에 해조로 하여금 상사에 쓸 물품을 넉넉히 주도록 하였다. 대개 효종조에 청국(淸國)의 구왕(九王)이 우리 나라와 혼인하려고 하여 사신을 보내 공주를 요구하였다. 효종이 그 요청을 어기기 어려워 종실인 금림군 이개윤(李愷胤)의 딸을 의순 공주(義順公主)라 하여 구왕에게 보내었다. 구왕이 죽자 대신 다른 친왕(親王)에게 보내졌는데, 친왕이 또 죽어버렸다. 개윤이 마침 봉명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정문(呈文)하여 돌려줄 것을 청하니, 청인이 허락하여 보내주었다. 이때에 이르러 병사하니, 상이 불쌍히 여겨 이런 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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