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 이건창
가학(家學)을 이어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했으며, 조선시대 당쟁 연구에 필요한 〈당의통략 黨議通略〉을 지었다. 본관은 전주. 초명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鳳藻), 호는 영재(寧齋). 할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시원(是遠)이고, 아버지는 상학(象學)이며, 어머니는 윤자구(尹滋九)의 딸이다. 개성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의 세거지(世居地)는 강화였으므로 계속 강화에서 살았다. 형제인 건승(建昇)·건면(建冕) 및 종형제인 건방(建芳) 등과 함께 할아버지로부터 가학인 양명학을 전수받았으며, 강위(姜瑋)·김택영(金澤榮)·황현(黃玹) 등과 교유했다. 1866년(고종 3) 15세 때 별시문과에 급제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 19세 때인 1870년에야 홍문관직에 나아갔다. 187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뽑혀 청나라에 가서 청의 문장가인 황각(黃珏)·장가양(張家驤)·서보(徐郙) 등과 교유했으며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 충청우도암행어사로 나가 감사 조병식(趙秉式)의 비행을 조사하고 임금에게 직접 보고하여 파면시켰다. 그러나 조병식의 사주에 의한 무고로 벽동군에 유배되었다. 1년 뒤에 풀려나 공사(公事)를 철저히 수행하다가 권세가들의 공격으로 귀양까지 가게 되자, 그뒤 벼슬길을 멀리했다. 그러나 왕이 간곡한 말로 부르자 1882년 경기도암행어사로 나가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고, 흉년을 당한 농민들의 구휼에 힘쓰는 한편 세금을 감면하여 주기도 했다. 그뒤 부모의 상을 당하여 6년간 집상(執喪)을 마치고 1891년 한성부소윤이 되었다. 이때 외국인이 서울의 가옥과 토지를 매점(買占)하는 일이 있자, 이를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를 하여 청국공사(淸國公使)의 항의를 받았으나, "나는 내 서울 백성하고 말하는 것이지 외국과 맺은 조약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청국의 압력으로 이듬해 보성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893년 함흥부에 안핵사로 내려가 난민을 다스리고, 관찰사의 잘못을 낱낱이 조사하여 파면시켰다.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관제에 의한 각부의 협판·특진관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했으며, 1896년 해주관찰사에 제수되었을 때도 사양하다가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 특지(特旨)로 2개월 뒤에 풀려나 향리인 강화에서 은거하다가 2년 뒤 47세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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