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성군 경절공 낙보 이래
계성군(鷄城君) 이내(李來)가 졸(卒)하였다. 이내(李來)의 옛 이름은 내(徠)요, 자(字)는 낙보(樂甫)인데, 경주(慶州) 사람이다. 아비는 우정언(右正言) 이존오(李存吾)인데, 전조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신돈(辛旽)의 간악함을 논함에 말이 심히 간절하고 곧아서 왕이 크게 노하여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신돈이 그 도당(徒黨)에게 사주하여 국문하여 다스려서 장차 죽이려 하는데, 이색(李穡)의 거듭 구원함에 힘입어서 죽음을 면하고,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폄출(貶出)되었으나, 근심하고 분개하여 병이 되어 죽었다. 신돈이 주살을 당하자 공민왕이 감동하여 깨닫고 이존오에게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을 증직하고 이내(李來)의 나이 겨우 10살인데, 어필(御筆)로 간신(諫臣) 이존오(李存吾)의 아들이라고 써서 특별히 전객 녹사(典客錄事)를 제수하였다.
계해년 과거에 합격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우사의 대부(右司義大夫)에 이르렀다. 임신년 4월에 정몽주(鄭夢周)에게 당부(黨附)하였다고 하여 곤장을 때리어 계림(鷄林)에 귀양보내었는데, 이해 겨울에 사유(赦宥)를 입어 공주(公州)석탄 별업(石灘別業)에 거주하였다. 기묘년에 상왕이 불러서 좌간의 대부(左諫議大夫)를 제수하였다. 경진년 정월에 이내(李來)가 방간(芳幹)의 처족으로서 방간이 난을 꾸미고자 꾀하는 것을 알고 그 좌주(座主)420) 우현보(禹玄寶)에게 고하여 주상에게 전달하였다. 일이 평정되자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로 발탁하여 추충 순의 좌명(推忠徇義佐命) 공신의 호를 내려 주었다. 을유년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이때에 종친으로 불법(不法)한 자가 있었으므로, 곧 탄핵하여 아뢰고 잡아 가두니, 임금이 노하여 지평(持平) 이흡(李洽)을 불러 힐난하여 꾸짖고 명하여 순금옥(巡禁獄)에 가두었다. 이내(李來)가 예궐(詣闕)하여 간쟁하니, 임금이 감동하여 깨닫고 이흡(李洽)을 용서하였다. 여러 번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전임(轉任)하고, 정해년에 좌빈객(左賓客)으로 세자를 따라 중국에 조현(朝見)하였고, 무자년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겸 판경승부사(判敬承府事)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 55세였다.
이내(李來)가 마음가짐이 단정하고 근신하고, 몸을 행동하는 것이 겸허하고 공손하고, 일가에게 은혜로 화목하고 사람을 신의로 접대하니, 임금의 예우(禮遇)가 심히 두터워서 서연(書筵)의 일을 이내에게 위임하였고, 이내도 또한 자임하였다. 그러므로 세자가 용자(容姿)를 고치어 예(禮)로 대접하였다. 병이 심하여 세자가 친히 가서 살펴보았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놀라고 슬퍼하여 따로 치부(致賻)하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부증(賻贈)·예장(禮葬)은 나라의 상전(常典)이 있다. 이것은 나의 사사 부의(賻儀) 이다."
하고,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사신을 보내어 사제(賜祭)하고, 시호를 경절(景節)이라 하였다. 첩의 아들이 이직생(李直生)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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