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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석탄 이존오, 부인 여흥민씨 -경주이씨-

by 보현당 2017.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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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 오존오

1360년(공민왕 9) 정몽주(鄭夢周), 문익점(文益漸) 등과 함께 문과에 급제한 이가 이존오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순경(順卿)이며 호는 석탄(石灘) 또는 고산(孤山)이다. 수원서기(水原書記)를 거쳐 사관에 발탁되었으며 1366년 우정언(右正言)이 되었다. 이때 신돈이 국권을 잡아 참람한 짓을 하여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25세의 청년 이존오가 격분하여 “요망한 물건이 나라를 그르치게 하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며 친척인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정추(鄭樞)와 함께 상소를 올렸다. “신 등이 삼가 3월 18일 전내(殿內)에서 베푼 문수회에 참석하였는데 영도첨의(領都僉議) 신돈이 재신의 반열에 앉지 않고 감히 전하와 나란히 앉아 사이가 몇 자 떨어지지 아니하니 나라사람이 놀래어 물 끓듯 하였습니다. … 그윽히 보건대 신돈이 지나치게 임금의 은총을 입어 나라 정사를 전단하여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습니다”하니 신돈을 총애하고 있던 임금이 반도 못 읽어보고 크게 노하여 불태워버리라 명령하고 정추와 이존오를 불러 꾸짖었다. 이때 신돈이 임금과 더불어 평상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이존오가 “늙은 중이 어찌 이와 같이 무례한가?”하고 소리쳐 신돈으로 하여금 황망히 평상에서 내리게 하였다. 임금도 이존오의 성난 눈이 두려웠다고 고백할 정도의 서슬이었다. 곧 벼슬에서 물러난 이존오는 공주 석탄(石灘)으로 은둔하여 울분 속에서 지내다가 신돈의 세력이 치성함을 원통해하며 31세의 나이로 병을 얻어 죽었다. 이존오가 죽고 난 3개월 뒤에 신돈이 역모에 연루되어 죽었다. 임금이 이존오의 충성을 아쉬워하면서 성균관대사성을 추증하고 열 살 난 이존오의 아들에게는 손수 “간관(諫官) 이존오의 아들 안국(安國)”이라 글을 써주면서 장차직장(掌車直長)에 제수하였다. 1708년(숙종 26) 여주의 유학(幼學) 신각(申慤) 등이 상소하기를 “전조의 정언 이존오는 10세 때에 강창시(江漲詩)를 지어 읊기를 ‘넓은 들은 모두 물에 잠겼는데 고산(孤山)만이 홀로 항복하지 않았도다’라고 한 고산은 곧 본주(本州)의 땅입니다. 많은 선비들이 이존오의 사당을 이곳에 지어서 숭봉하니 청컨대 은액(恩額)을 내려 주소서” 하니 특별히 허락하는 비답을 내렸다. 또 1826년(순조 26) 좌의정 이상황(李相璜)이 고산서원에 배향된 이존오는 여주사람이고 조한영(曹漢英) 역시 여주 사람이니 조한영을 고산서원에 추가 배향할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대신면 후포리에 있던 고산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1871년(고종 8) 훼철되었다. 저서로는 『석탄집(石灘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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