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혜공주의 묘지명〔敬惠公主墓誌銘〕 - 삼탄집 제14권 : 삼탄 이승소(李承召, 1422~1484)
경혜공주는 문종 공순대왕(文宗恭順大王)의 따님이다. 어머니 권씨(權氏)는 바로 현덕왕후(顯德王后)이며 뒤에 폐위(廢位)되었다. 안동(安東)의 대성(大姓)인 고려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후손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낸 권전(權專)이 태부(太傅)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12대손인 부정(副正) 최용(崔鄘)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영락(永樂) 무술년(1418, 태종18)에 왕후를 낳았다. 선덕(宣德) 신해년(1431, 세종13)에 궁궐로 선발되어 들어가 문종(文宗)을 저궁(儲宮)에서 모시었으며, 을묘년(1435)에 공주를 낳았다.
공주는 경오년(1450)에 정종(鄭悰)에게 시집갔는데, 정종은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정도공(貞度公) 정역(鄭易)의 손자이며, 형조 참판 정충경(鄭忠敬)의 아들이다. 경태(景泰) 을해년(1455, 세조1)에 정종이 죄를 지어 광주(光州)에 유배되자, 공주가 따라가 있으면서 온갖 곤욕을 다 치렀는데, 일반 사람들도 감당해 내지 못할 바였다. 그런데도 조금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기색이 없이 아침저녁으로 아녀자로서 도리를 다하면서 더욱더 경건하게 하며 해이하지 않았다. 정종이 마침내 죽음에 이르자 공주는 애통해하기를 예법대로 다하였으며, 어린아이들을 잘 어루만져 길렀다. 이에 기구한 운수를 만난 데 대해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아녀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데 대해 흠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천순(天順) 신사년(1461, 세조7)에 세조께서 중관(中官)을 보내어 경사(京師)로 소환하고는 특별히 노비 50구(口)를 하사하고 종신토록 1품관의 녹봉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성화(成化) 을유년(1465)에 집 한 채를 하사하였다. 기축년(1469, 예종1)에 예종께서 또 노비 50구를 하사하였으며, 대왕대비(大王大妃)께서 더욱더 사랑을 쏟아 때때로 대궐 안으로 불러들여 여러 날 동안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계사년(1473, 성종4) 동12월에 병에 걸리자 상께서 내의(內醫)를 보내어 진찰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약(藥)을 하사하여 치료하게 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28일 아무 갑자에 집에서 졸하니, 향년은 40세였다. 부음을 아뢰자 상께서 유사에게 명하여 조문하는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부의를 하사하고 관가에서 장사를 돌보아 주게 하였다. 다음 해인 갑오년(1474) 3월 아무 날에 고양(高陽)에 있는 아무 산 아무 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주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미수(鄭眉壽)로 지금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으로 있으며, 딸은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무릇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장수하고 요절하며 궁박하고 통달함에는 운수가 있는 법으로, 저 푸른 하늘은 아무런 단서가 없어서 기필할 수 없다. 무릇 귀한 왕녀(王女)의 신분인데도 그 복록을 누리지 못하였으며, 정숙하고 화락한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장수를 누리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비록 그렇지만 하늘이 보답하는 것은 소홀하면서도 잊지 않는 법이니, 흐르는 광채와 남은 경사가 장차 후세를 기다려서 더욱더 크게 빛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천명이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징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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