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부원군 문익공 한준겸
<<답사일 : 2008년 4월 5일>>
1557 (명종 12) ~ 1627 (인조 5) 조선의 정치가. 인조(仁祖)의 장인.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川). 시호는 문익(文翼). 본관은 청주(淸州). 생원에 장원으로, 진사에 7등으로 합격, 태릉(泰陵) 참봉이 되었다가 1586년(선조 19) 문과에 급제, 사국(史局)에 뽑혀 검열(檢閱)이 되었다. 선조가 출제하여 유신(儒臣)들에게 글을 짓게 했을 때 수위로 뽑혀 표피(豹皮)를 상으로 받았으며, 금천(衿川) 현감으로 재직 중 정여립(鄭汝立)의 반란이 일어나자, 앞서 정여립의 사위 이진길(李震吉)을 천거했었던 관계로 수금되었다.
1592년 예조 정랑을 거쳐 원주 목사(原州牧使)ㆍ지평(持平) 등을 거쳐 1597년(선조 30) 승지(承旨)에 이르러 왜병이 또다시 쳐들어오자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를 도와 마초와 식량 등의 수집ㆍ저장에 노력하였고, 경기도 관찰사ㆍ대사성ㆍ영남 안찰사가 됐다. 준겸은 원래 정인홍(鄭仁弘)을 싫어하여 그 집 앞을 지나면서도 방문하지 않았던 바 인홍의 일당인 문홍도(文弘道)의 무고로 파직되었다. 1600년 다시 기용되어 병조 참판, 이듬해에 4도 체찰사 부사(四道體察使副使)를 겸했고 호남 안찰사(按察使)ㆍ예조 참판에 보직되었다.
당시 변경에 호적들의 침범이 잦아 4도 도원수(四道都元帥)로 보직되고는 부제학을 겸하였고, 호조 판서, 관서(關西)ㆍ영북(嶺北)의 안찰사가 되었으나 1613년(광해군 5) 계축(癸丑)의 옥사(獄事)에 관련되어 수금되었다가 쫓겨났다. 다시 충원(忠原)에서 5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적소에서 지중추부사로의 소명(召命)을 받고 5도 도원수를 겸하여 중화(中和)에 부(府)를 두고 북로(北虜)의 침입을 방어하였다. 인조가 반정한 후에 임금의 장인으로서 영돈령 부사(領敦寧府事)ㆍ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이 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왕을 공주에 모시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세자를 전주(全州)에 모시고 적이 물러간 뒤에 서울에 돌아와 사망했다. 선조의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다.
<<자료출처 :인명사전, 인명사전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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