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기해박해 당시에 순교한 천주교인. 세례명 바오로. 본관은 나주(羅州). 경기도 양근 출생. 초대 명도회장(明道會長)인 약종(若鍾)의 둘째아들이며, 약용(若鏞)의 조카이다. 어려서 서울로 이사하여 살던 중 1801년(순조 1)에 아버지와 맏형 철상(哲祥)이 순교하자 어머니는 어린 남매인 하상과 정혜(情惠)를 데리고 시댁이 있는 마재(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로 낙향하였다. 20세 때 홀로 서울에 다시 올라와 조숙(베드로) · 권천례(데레사) 부부의 집에 기거하면서, 신유박해로 폐허가 된 조선교회의 재건과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그러던 중 1816년 동지사(冬至使) 통역관의 하인이 되어 북경에 들어가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그러나 북경교구의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 뒤 아홉 차례나 국금(國禁)의 위험을 무릅쓰고 북경을 내왕하면서 꾸준히 청원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1824년 이후에는 유진길과 조신철(趙信喆)이 이 일에 동참하였다.이렇게 해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1825년에 유진길 등과 연명으로 로마 교황에게 직접 청원문을 올려 조선교회의 사정을 알리는 동시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 청원문은 1827년 교황청에 접수되어, 마침내 1831년 9월 9일자로 조선교구의 설정이 선포되고, 초대 교구장에 브뤼기에르(Bruguiere,B.) 주교가 임명되었다.이후 1834년 1월에는 유방제(劉方濟, 즉 여항덕)신부를 서울로 잠입시켰고, 1836년에는 모방(Maubant,P.P.) 신부를, 1837년에는 샤스탕(Chastan,J.H.) 신부와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Imbert,L.M.J.) 주교를 맞아들임으로써 조선교회는 비로소 명실상부한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정하상은 이 때부터 주교 밑에서 전교활동을 도와 교회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리고 1838년경에는 앵베르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라틴어와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앵베르 주교는 3년 안에 정하상 등에게 신품(神品)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고 정하상도 7월 가족과 함께 체포되고 9월 22일 순교하여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그는 체포될 것을 미리 짐작하고 한국인 최초의 호교론서인 「상재상서 上宰相書」를 작성해 두었다가 체포된 다음 관헌에게 제출하여 천주교의 도리를 밝혀 박해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1925년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시성(諡聖)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하상(丁夏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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