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조선왕릉

(15대) 광해군묘 - 광해군, 문성군부인 문화류씨 [사적 제363호]

by 보현당 2012. 11. 18.
반응형

광해군(光海君),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광해군(光海君, 1575년 음력 4월 25일~1641년 음력 7월 1일)은 조선의 제15대 임금이다. 는 혼(琿). 선조(宣祖)와 공빈 김씨(恭嬪 金氏)의 둘째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었고, 함경도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으는 데에도 힘썼다. 임진왜란 동안 세자의 몸으로 부왕을 돕고 전쟁 승리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부왕의 인정은커녕 견제와 냉대를 당해야 했다.

임진왜란 이후 우여곡절 끝에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듯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며, 후금과의 전쟁 위기 상황에서 실리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위 옹립에 공이 컸던 대북파의 반발로 당쟁에 휘말리고 말았으며, 이후 서인(西人)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이후 줄곧 인목왕후(仁穆王后)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했다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이유로 패륜자로 일컬어져 왔으나, 현대에 들어와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전에 폐위되었기에 사후 시호는 없으며 살아있을 때 받은 존호는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이다.

 

- 폐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된 후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다가 1641년 67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서인 이귀, 김류, 최명길(崔鳴吉), 김자점(金自點) 등은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綾陽君) 종(倧)을 받들어 인조반정을 단행하고 궁궐을 장악했다. 이들은 광해군을 인목왕후 앞으로 끌고 가 정죄한 뒤 유배시켰다. 인목왕후는 광해군과 폐세자에 대한 처형을 주장하였으나, 인조와 반정 세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반정을 마무리 짓게 된다.

곧 반정군에 의해 이이첨, 정인홍, 김개시 등은 죽임당하고, 40여 명의 관리가 구금된다. 광해군은 곧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탈출하려던 아들 폐세자 질과 며느리 박씨는 탈출에 실패하고 자결하였고, 부인 유씨 역시 화병으로 사망하였다.

그 뒤 다시 제주도로 옮겨져 유배살이를 하였으며, 후금(청나라)측에서 정묘호란의 명분으로 광해군의 폐위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였다. 이후 몇 차례 역모 사건에 거론되었는데, 심지어는 광해군 스스로 친필 밀서를 역모 세력에게 전달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조와 집권 서인은 그를 죽이지 않고 천수를 누리도록 하였다. 한편 유배지에서는 상궁과 포졸들로부터 영감이라는 모욕적인 호칭을 듣기도 했다. 초연히 유배 생활을 지내던 광해군은 1641년(인조 19)에 67세를 일기로 죽었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내용일부 발췌>>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