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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06대) 장릉(莊陵) - 단종(端宗) [사적 제196호]

by 보현당 201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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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端宗)[장릉(莊陵)]

 

- 문종(文宗)이 임종(臨終)에 앞서 단종(端宗)의 유충(幼沖)함을 염려하여 영의정 황보인(領議政 黃甫仁), 좌의정 김종서(左議政 金宗瑞) 등에 보좌(補佐)를 유언(遺言)으로 남겼으나 고명대신 등(顧命大臣 等)이 단종 원년(端宗 元年)(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피살(被殺)되고 문종(文宗)의 제(弟)이며 왕숙(王叔)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군국대사(軍國大事)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였고 수양(首陽)은 동복제 안평대군(同腹弟 安平大君)이 고명대신(顧命大臣)과 불궤(不軌)를 꾀하였다 하여 강화도(江華島)로 추방(追放)하고 단종(端宗) 3년(1455년) 윤6월(閏6月) 11일 역시 동복제 금성대군(同腹弟 錦城大君)을 역모(逆謀)의 죄(罪)로 종친(宗親), 궁인(宮人), 시신(侍臣)과 함께 유배(流配)시키자 단종(端宗)은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선양(禪讓)하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세조(世祖) 3년(1457년) 9월 순흥(順興)에 유배(流配)되었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비(端宗妃)의 부 송현수(父 宋玹壽)와의 단종복위계책(端宗復位計策)이 발각되자 노산군(魯山君)은 폐서인(廢庶人)이 되었고 이 해 10월 24일 사사(賜死)되었으니 춘추 17세(春秋 17歲)였다.

- 단종(端宗)의 유해(遺骸)는 동강(東江)에 흘렀는데 영월호장 엄흥도(寧越戶長 嚴興道)가 국법(國法)을 어기고 어시(御屍)를 수습(收拾)하여 발산 동을지 신좌을향(鉢山 冬乙旨 辛坐乙向)(남서(南西)에서 북동향(北東向))에 밀장(密葬)하였으며 중종(中宗) 11년(1516년)에 노산묘(魯山墓)를 찾으라는 왕명(王命)이 있었고 고노호장 엄수(故老戶長 嚴壽), 양인 지무작(良人 智無作), 관노 이말산 등(官奴 李末山 等)의 진언(進言)으로 이해 12월 15일 성분(成墳)하였으나 다시 방치(放置)되었고 중종(中宗) 36년(1541년)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寧越郡守 朴忠元)이 현몽(顯夢)에 따라 노산묘(魯山墓)를 찾고 묘소(墓所)를 수축 봉제(收縮 奉祭)하였다. 선조(先祖) 13년(1580년) 강원감사 정철(江原監司 鄭澈)의 상계(狀啓)에 따라 상석(床石), 표석(標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을 세웠다.

- 임란(壬亂) 이후 봉묘치제(奉墓致祭)가 다시 소홀(疏忽)해졌으며 숙종(肅宗) 7년(1681년) 7월 21일 노산군(魯山君)을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追封)하였고 숙종(肅宗) 24년(1698년) 11월 6일 추복(追復)하여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으로 하고 종묘 영녕전(宗廟 永寧殿)에 부묘(廟)하였으며 릉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단종(端宗)이 승하(昇遐)한지 241년만에 변례(變禮)를 버리고 왕실(王室)의 정례(正禮)를 되찾게 된 것이다.

 

 

 

 

 

 

 

 

 

 

 

 

 

 

 

 

 

 

 

 

 

 

 

 

 

 

 

 

 

 충의공 엄흥도  묘 http://madangca.blog.me/30066532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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