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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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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14

(숙종의 국구) 광성부원군 김만기 [문충공], 서원부부인 청주한씨 광성부원군 문충공 정관재 김만기 본관은 광산. 자는 영숙(永淑), 호는 서석(瑞石)·정관재(靜觀齋). 증조부는 형조참판을 지낸 장생(長生)이며, 아버지는 생원 익겸(益兼)이다. 인경왕후의 아버지인 숙부 익희(益熙)에게 수학하고,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 되었다. 1652년(효종 3)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고 수찬·정언·교리 등을 지냈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문제로 논란이 일어났을 때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했으며, 3년설을 제기한 남인 윤선도(尹善道)를 공격했다(→ 기해예송). 1671년(현종 12) 딸이 세자빈이 되었고, 1673년 영릉(寧陵)을 옮길 때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당상관이 되었으며, 그뒤 병조판서를 지냈다. 1674년 숙종이.. 2012. 9. 18.
(문신) 북헌 김춘택[충문공], 정경부인 완산이씨 충문공 북헌 김춘택 본관은 광산. 자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 숙종의 장인인 만기(萬基)의 손자이며, 호조판서 진구(鎭龜)의 아들이다. 서인 노론의 중심가문에 속하여,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이후 남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 여러 번 투옥·유배되었다. 1694년 재물을 써서 궁중에 내통하여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려다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축출되자 풀려났다.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갈라지자 노론에 속하여 1701년 소론의 탄핵으로 부안에 유배되었다. 1706년에는 희빈 장씨의 소생인 세자(뒤의 경종)를 모해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제주에 안치되었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고, 문장이 유창하여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했다. 저서에 〈북헌집〉과.. 2012. 9. 15.
(문신) 광은군 김진구 [경헌공], 정경부인 한산이씨 광은군 경헌공 만구와 김진구 1651년(효종 2)∼1704년(숙종 30). 조선 숙종 때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수보(守甫), 호는 만구와(晩求窩). 영돈령부사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만기(萬基)의 아들이고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오빠이다. 168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관이 되어 《현종실록》 수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정언·헌납·교리·응교·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684년 경상감사가 되었으며 이어 승지가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에 의하여 남인정권이 들어서자 김석주(金錫胄)와 함께 가혹한 수법으로 남인을 숙청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풀려나 호조판서에 기용되고, 곧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도승지·전라.. 2012. 9. 15.
(태종) 양녕대군 이제 [강정공], 수성부부인 광산김씨 양녕대군 강정공 이제 태종의 맏아들. 이름은 제(褆), 자는 후백(厚伯). 어머니는 민제(閔霽)의 딸이며, 부인은 김한로(金漢老)의 딸이다. 1402년(태종 2) 원자(元子)로 봉해졌으며, 1404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09년 이후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일정한 범위 내에서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나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세자로 책봉된 직후부터 학문에 게으르고 무절제하다고 하여 태종에게 지적을 받았으며, 나이가 들면서 방종이 더욱 심해져, 태학(怠學)·정강(停講)이 계속되었다. 또한 매와 개 등 완물(玩物)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군소배들과 어울려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다. 1417년에는 태종이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라고 준 왕친록(王親錄)을 .. 2012.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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