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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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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묘15

(태조) 익안대군 이방의[안양공] -전주이씨- 익안대군 안양공 이방의 이름 방의(芳毅). 시호 안양(安襄).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소생. 1392년 태조가 즉위하자 익안군(益安君)에 봉해졌으며, 1398년(태조 7)의 제1차 왕자의 난과 1400년(정종 2)의 제2차 왕자의 난에 아우 방원(芳遠:太宗)을 보좌하여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과 좌명공신(佐命功臣) 2등에 각각 책록되고,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1398년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에 추록(追錄)되고 1400년(태종 즉위) 대군(大君)이 되었다. 정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마한공(馬韓公)에 추봉되었다. 후배 부부인 이씨묘는 양주 이나 실전된듯 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익안대군 [益安大君] (두산백과) 2015. 12. 8.
(선조) 영창대군 이의 영창대군 이의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년~1614년)은 선조의 아들로, 인목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의(㼁)이다. 선조의 영창대군은 유일한 적자이다. 선조는 이미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을 싫어하여 영의정(領議政) 유영경(柳永慶) 이하 몇몇 신하와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몰래 의논하였다. 이 눈치를 안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은 세자를 바꿔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다가 선조의 비위를 거슬러 무근한 소리를 퍼뜨린다는 죄목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길 떠나는 것을 차일피일하던 차에 갑자기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광해군은 당일로 왕위에 올라 이들도 다시 불러 등용하였다. 1611년(광해군 3년)에 영창대군에 책봉되었다. 앞서 선조가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삼으려던 일 때문에 영창대군을 둘러싼 갈등이.. 2015. 6. 7.
(임영대군 계배) 제안부부인 전주최씨 2014. 3. 1.
(임영대군 초배) 대군부인 의령남씨 2014. 3. 1.
(세종) 임영대군 이구 [정간공] 임영대군 휘는 구(구), 자는 헌지(獻之), 시호는 정간(貞簡). 세종대왕의 제4남이며 모친은 소헌왕후 심씨이다. 대군은 성품이 조용하고 인자하며 부귀를 탐하지 않았다. 학문을 닦는 데 힘써 시 · 서 · 경 · 사와 병서를 공부하였다. 또한 사물제작의 정교한 솜씨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경탄을 받았다. 재능을 안 세종대왕은 화포제작의 감독을 명하였다. 대군이 제작한 화살은 종전에 2∼3백보 나가던 것이 천여 보 안팎까지 나갔다. 군사기기의 성능을 개량하기도 하여 대군은 `병기와 군사에 관한 지보(至寶)'라고 불렸다. 대군은 평생을 정의 · 성실 · 청렴 · 검약으로 일관하였으며, 부귀와 사치를 멀리 하였다. 세종대왕의 왕자들 중에 가장 청빈하게 생활하였다. 또한 의기는 활발하고 의론에 뛰어나 사람들을 항상.. 2014.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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