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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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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28

(독립운동가) 전태순 -천안전씨- 독립운동가 전태순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이다. 1919년 3월 23일 김포군 양촌면(陽村面)에서 박충서(朴忠緖)가 주도하는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 박승각(朴勝珏)·박승만(朴勝萬)·안성환(安聖煥) 등과 함께 격문과 선언문 10여매를 작성하여 인근마을 주민들에게 배부한 후, 이날 양곡(陽谷)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는 등 일경의 총격에도 굴하지 않고 활동을 계속하다.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었다. 이해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6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17. 12. 22.
(독립운동가) 임용우 -부안임씨- 독립운동가 임용우 1884년(고종 21) 경기도(지금의 인천광역시) 김포(金浦)에서 태어나, 10년간 서당에서 한학을 익힌 뒤, 4년 동안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3년간 마산 창신학교(昌信學校) 교사로 있다가 덕적면(德積面)에 사립 명덕학교(明德學校)를 설립하고 8년간 교사로 재직하였다. 명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19년 2월 말에 천도교(天道敎) 측의 연락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 그해 3월 1일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같은 달 29일에는 윤영규(尹寧圭)·최복석(崔復錫) 등과 월곶면(月串面) 갈산리(葛山里)·조강리(祖江里) 일대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이어 군하리(郡下里) 향교와 공립보통학교·면사무소를 차례로 행진하면서 항일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9일에는 덕적.. 2017. 9. 26.
(독립운동가) 어수갑 독립운동가 어수갑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1908년 교동(校洞)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중퇴했다. 1909년 4월부터 1911년 3월까지 휘문의숙 예비과에서 수학했다. 그해 4월부터 1913년 3월까지 서울 중앙학교에서 수학했다. 같은 해 4월 경성전수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3월 졸업했다. 이후 포천 청성학교(靑城學校) 교원으로 근무했다. 1915년 3월 청성학교를 그만두고 1916년 5월 철원 사립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7월 퇴직했다. 1922년 2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제령(制令) 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시대일보』 기자가 되었다. 1924년 11월 화요회에 가입했다.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경성부 .. 2017. 9. 26.
(독립운동가) 전태순 독립운동가 전태순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이다. 1919년 3월 23일 김포군 양촌면(陽村面)에서 박충서(朴忠緖)가 주도하는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 박승각(朴勝珏)·박승만(朴勝萬)·안성환(安聖煥) 등과 함께 격문과 선언문 10여매를 작성하여 인근마을 주민들에게 배부한 후, 이날 양곡(陽谷)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는 등 일경의 총격에도 굴하지 않고 활동을 계속하다.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었다. 이해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6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17. 9. 26.
(독립운동가, 정치가) 몽양 여운형 -함양여씨- 몽양 여운형 1886∼1947. 독립운동가·정치가.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07년 경기도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지회를 설립하여 활동하였으며, 이 무렵 개신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Clark. .. 2017. 2. 11.
(애국지사) 최성모 -민족표대33인- 애국지사 민족대표 33인 최성모 1874년 ~ 1937년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1919년 2월, 당시 중앙기독교청년회(中央基督敎靑年會) 간사로 있던 박희도(朴熙道)로부터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전해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기로 한다. 2월 26일 이승훈(李昇熏), 오화영(吳華英), 이필주(李弼柱), 함태영(咸台永), 안세환(安世桓), 이갑성(李甲成), 박희도 등 기독교측 대표들과 한강(漢江) 인도교위에서 만나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에 서명 날인할 기독교측의 대표자를 뽑았다. 이튿날인 27일에는 그의 집에서 기독교측 대표들과 다시 만나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의 초안을 회람한 후, 이에 찬성하여 기독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한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천도.. 2016. 5. 25.
(독립운동가) 성재 이시영 -초대 부통령- 초대 부통령 성재 이시영 1869(고종 6)∼1953. 독립운동가·정치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흡(聖翕),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서울 출신. 아버지는 이조판서 유승(裕承)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이다. 첫 부인은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의 딸이며, 둘째부인은 반남박씨이다. 1885년(고종 22) 관직에 나아가 10여 년간 형조좌랑·홍문관교리·승정원부승지·궁내부수석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관직을 물러난 뒤로는 중형 이회영(李會榮)·이상설(李相卨) 등과 근대학문탐구에 몰두하였다. 1905년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되었으나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을 계기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1906년 재차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되었고, 근대학교설립 및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그 뒤 19.. 2016. 5. 6.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이은숙 여사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1867(고종 4)∼1932.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우당(友堂). 서울 출신.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한편,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협의하여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책임자로 하여금 교포 교육에 주력하도록 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릴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 2016. 5. 6.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우강 양기탁 국무령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우강 양기탁 1871(고종 8)∼1938. 독립운동가·언론인. 초명은 의종(宜鍾), 호는 우강(雩岡). 평안남도 평양 출신. 아버지는 양시영(梁時英)이며, 어머니는 인동 장씨(仁同張氏)이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상경하여 동학당 및 유림(儒林)의 명망가이며 우국지사인 나현태(羅鉉泰)를 만나 시야를 넓혔다. 1895년 미국인 선교사 게일(Gale,J.S., 奇一) 및 아버지와 더불어 한국 최초의 『한영자전 韓英字典』을 편수하고, 이듬해 독립협회에 가입했으며, 1898년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00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게일의 알선으로 3년간 일본과 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1902년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준(李儁)·이상설(李相卨)·.. 2016. 4. 23.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제2대 겸곡 박은식 대통령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겸곡 박은식 1859(철종 10)∼1925. 조선 말기·일제강점기의 학자·언론인·독립운동가.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성칠(聖七), 호는 겸곡(謙谷)·백암(白巖). 황해도 황주 출생. 농촌 서당 훈장 용호(用浩)의 아들이다. 국권을 잃은 후 중국에 망명해 독립운동에 종사할 때에는 박기정(朴箕貞)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했고, 태백광노(太白狂奴) 또는 무치생(無恥生)의 별호를 쓰기도 하였다. 10세부터 17세까지 아버지의 서당에서 정통파 성리학과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다. 과거공부에 회의를 느껴 고향을 떠나 당시 황해도 일대에서 이름나 있던 안태훈(安泰勳 : 安重根의 아버지)과 교우하면서 문장을 겨루어 황해도의 양 신동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이후 전국을 답사하던 중 188.. 2016.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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