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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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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28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 국무령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 1858(철종 9)∼1932.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상희(象羲).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경상북도 안동 출신이다. 1911년 서간도(西間島)로 망명 후 계원(啓元)으로, 이어서 상룡(相龍)으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승목(承穆)이며,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이다. 정치제도와 실용지학(實用之學)을 탐구했으며, 천문·지리·수학 등에 관심이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도곡선재(陶谷先齋)에 은신하면서 병학(兵學)에 몰두하였다. 1896년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가야산에 군사 진지를 구축하고 의병 항전을 시도하였다. 안동의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을 지원하기도 했으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근대적 군사력에 대항하는 국내에서의 의병 항쟁.. 2016. 4. 23.
(독립운동가) 김봉성 -망우리공원묘지- 독립운동가 김봉성 1919년 3월 1일 평북 선천군(宣川郡) 선천읍(宣川邑)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선천의 만세시위는 민족대표였던 이승훈(李昇薰)이 신성학교(信聖學校) 성경교사였던 홍성익(洪盛益)에게 3월 1일 신성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부탁하며 추진되었다. 홍성익은 동료 교사인 김지웅(金志雄) 등과 연락을 취하며 만세시위 계획을 추진하였다. 신성학교 내의 업무는 김지웅이 담당하였는데, 그는 학생들을 불러 독립선언서 등사 등을 맡겼다. 당시 신성학교 4년생이던 그는 김지웅의 지시에 따라 동급생인 장일현(張日炫)·고병간(高秉幹)·박찬빈(朴贊彬) 등과 함께 도쿄[東京]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한편 시위 현장에서 사용할 태극기도 대량으로 제작하였다. 3.. 2016. 1. 22.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이혜련 여사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1878년 11월 9일 평남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일명 도롱섬)에서 안흥국(安興國)의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빈농의 선비로 당 27세, 어머니 황씨는 당 32세, 형은 치호(致浩)이다. 8세까지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9세에서 14세까지는 강서군 심정리에 머물며 김현진(金鉉鎭)에게 한학을 배웠다. 이때 서당 선배인 필대은(畢大殷)과 알게 되어 그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받았다. 1895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교육을 통해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1896년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경영하는 구세 학당에 입학하여, 이 곳에서 3년간 수학하면서 서구 문물과 접하게 되었다.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이상재, 이승만, 윤치호 등과 만민 공동.. 2016. 1. 20.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초장지 -망우리공원묘지-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초장지 2016. 1. 20.
(독립운동가) 태허 유상규 -망우리공원묘지- 독립운동가 태허 유상규 유상규(劉相奎, 1897~1936)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외과의사로서 대중 의료보건에 힘썼다. 호는 태허(太虛). 본관은 강릉. 1897년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읍 서부동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태허이다. 경신중학교에 입학, 1916년 3월 제11회로 졸업하고 그해 4월에 새로 설립된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에 [제1회]로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 에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을 모으고 동원하는 등 3.1 독립운동의 주된 역할을 하였으며 ( 압록강은 흐른다, 이미륵 참조)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을 1년 앞둔 3학년을 다 끝마친 때였으나 학업을 포기하고 상해로 망명하였으며 학교는 퇴교를 당하였다.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상하이로 건너간 유상규.. 2016. 1. 20.
(독립운동가) 현포 이병홍 독립운동가 현포 이병홍 이병홍 ( 李炳洪, 1891.~1955.10.17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람이다. 1919년 3월 3일에 있은 고종황제의 국장일을 계기로 하여 거족적인 민족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고, 진주 또한 3월 18일부터 5월까지 대소 20여 회에 가까운 시위에 3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하였다. 진양군 내에서 발생한 주요한 만세 시위 운동은 정촌면과 미천면을 들 수 있다. 단성면 배양리에 거주하던 이병홍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정촌면 관봉리 강재순(姜在淳)에게 서울의 3.1운동을 목격하고 숨겨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넘겨주고 동지 이종언(李種彦)과 수백장의 선언서를 찍어내어 인근 동지들에게 비밀리에 전달하여 다 같이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등 조국 광복에 힘썼다. 상해임시정부 요인으.. 2012. 11. 2.
(독립운동가) 준영 오재영(吳在英) 독립운동가 준영 오재영 오재영(吳在英, 1897∼1948), 독립운동가, 1920년 의열단원인 박재혁 선생의 부산경찰서 폭탄투척 거사를 지원하였고, 최근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저격 거사 직전 훈춘시 진탕촌 인근 취안허(圈河)촌에 머물면서 이 마을을 개척한 유지이며 숭신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을 한 오재영의 집에서 한달간 머물며 권총을 지원받았다는 증언이 나와 주목을 끌고 있다. * 오재영 선생 묘가 없고 오준영 선생 묘가 있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지나가시던 어르신께서 오재영선생 호가 준영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2012. 10. 24.
(독립운동가) 춘파 서동일(徐東日), 부인 최옥경 독립운동가 춘파 서동일 - 2009년 가을 망우리 공원묘지를 방문했다. 그것도 혼자 독립운동가 서동일 선생 묘를 참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관리사무소로 보이는 곳에 들어가 독립운동가 서동일 선생 묘를 찾는데 위치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묘비가 부인묘비라서 번호로 찾아야 한다고 하면서 자세하게 알려준다. 그냥 부인 이름 알려줘도 되는데. 오는 길에 오재영 선생, 이중섭 선생 묘소도 참배하면서 내려왔다. 공원묘지에서 일반 묘를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필자의 증조모, 조부모 묘소가 공원묘지에 있는터라 찾는건 일도 아니다. 서동일 선생께서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2011년 망우리에 갔을 때는 어떤 젊은 학생이(필자보다 어려 보임 그래서 물어봤더니 대학이라고 함) 서동일 선생 묘역을 찾는.. 201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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