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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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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평윤씨9

(문신) 종정공 권사종, 국대부인 벽진이씨 -안동권씨- 판종정시사 권사종 정3품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종정시사(判宗正寺事)에 이르렀고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공조전서를 지낸 판사공(判事公) 집중(執中)이고 차자는 우왕 6년 병과 급제하여 상주목사를 지낸 집경(執經), 삼자는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지낸 예빈공(禮賓公) 집지(執智), 4자는 영남 서부일대에 세거하는 계파조 군기감정(軍器監正)을 지낸 감정공(監正公) 집덕(執德)과 2녀가 있다. 장녀는 해평인 판밀직사사 윤가관이며, 차녀는 해주인 판예의사사 정윤규의 아들인 좌찬성 대제학 정도공 정역이시다. 2020. 12. 26.
(정치인) 동산 윤치영, 이병영 여사, 이은혜 여사 -해평윤씨- 1898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낸 윤치오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윤치소의 동생이며, 윤웅렬이 백부이다. 1911년 서울 교동보통학교와 1915년 경성중앙기독교청년회 영어학교를 졸업한 후, 1917년 도쿄 세이소구(正則)영어학교를 수료했다. 일본에 유학하는 동안 1918년 재일조선인유학생학우회의 체육부장과 사교부장, 1922년 재일조선기독교청년회 사교부 간사로 활동했다. 1922년 와세다(早稻田)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 헤이스팅스대학, 콜럼비아대학, 엘리자베스시티주립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32년 조지워싱턴대학에서 학사학위를 취득, 1934년 아메리칸대학에서 국제법을 연구해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유학시절인 1928년에는 재미한인유학생총회 사교부장.. 2018. 12. 8.
(윤취동 후배) 정부인 안동김씨 2018. 12. 6.
(효자) 신덕재 윤취동 -해평윤씨-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해평(海平), 호는 신덕재(新德齋)이다. 윤두수(尹斗壽)의 7대손이며,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낸 윤세겸(尹世謙)의 증손자이다. 할아버지는 윤발(尹潑)이고, 아버지는 윤득실(尹得實)이다. 윤취동(尹取東)[1798~1863]은 어릴 때부터 손수 나무를 하고 불을 때며 효성으로 부모를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자신의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였고, 아버지가 병들었을 때는 자신이 대신 아프게 해 달라고 하늘에 기도하며 소원을 빌었다. 큰아버지를 아버지 같이 섬겼고,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돌보았다. 친족과 외족을 위해 모두 위토전[산소에서 제사를 지내는 데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경작하는 밭]을 마련해 두기도 했다. 흉년이 들었을 때는 굶주린 백성을 구.. 2018. 12. 6.
(무신, 친일반민족행위자) 반계 윤웅렬, 정부인 전주이씨 -해평윤씨- 1840(헌종 6)∼1911.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기 관료·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해평(海平). 충청남도 아산 출신. 자는 영중(英仲), 호는 반계(磻溪)이다. 윤치호(尹致昊)의 아버지이다. 1856년(철종 7) 무과에 합격하였고, 1861년 충청도 감영중군 겸 공주중군, 1862년 함경북도 병마우후 겸 토포사로 임명되었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동행하여 도쿄에서 흥아회 모임에 참석하였고, 일본의 조야인사와 교유하였다. 1881년 조선 최초의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조직·운영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하였으며, 통리기무아문사·남양부사로 임명되었다.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이승모를 일본 공관에 보내 군민들이 공관을 습격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일본 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에게 .. 2018. 12. 6.
(문신, 친일반민족행위자) 좌옹 윤치호, 소주마씨, 남포백씨 -해평윤씨- 1865년 충남 아산(牙山)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당시 충청감영중군(忠淸監營中軍)을 지낸 윤웅렬(尹雄烈)이다. 9세 때 서울로 유학하여 체계적으로 학문을 익혔다.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을 다녀온 부친의 권유로 1881년 어윤중(魚允中)을 수행하여 유길준(兪吉濬), 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당시 조사 시찰단의 일부는 일본에 남아 신학문을 공부하였는데 윤치호도 도진샤[同人社]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서양학문을 익혔다. 김옥균, 서광범, 유길준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조선의 개화를 위해 노력했다. 1883년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 비준 때 초대 주한(駐韓) 미국공사 L.H.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여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2018. 12. 3.
(문신) 명휴 김천석, 숙인 해평윤씨, 숙인 성주이씨 -연안김씨- 명휴 김천석 조선의 문신. 자는 명휴(命休), 연흥부원군 제남(悌男)의 손자.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贍) 등에게 조부가 사사(賜死)되고 일족이 대부분 화를 입을 때 변장하여 화를 면하고 전국을 방랑,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인조의 특명으로 기용되어 돈령부 참봉(敦寧府參奉)에 올라 김제남의 사당을 모시게 되었다. 후에 홍산(鴻山)·홍천(洪川)·금성(金城)·마전(麻田) 등의 수령(守令)을 역임했다. 2016. 8. 21.
(영해군파) 벽계도정 이종숙, 신부인 해평윤씨 -전주이씨- 휘(諱)는 종숙(終叔), 호(號)는 현옹(玄翁). 길안도정의 5남이며 어머니는 현부인 여산송씨이다. 품계는 명선대부(明善大夫)에 올랐다. 젊었을 때부터 절조 있는 행실(行實)로 생활해 오며 학문에 독실(篤實)하였다. 당시의 혼탁한 세상에 분개하여 이를 사물에 빗대어 풍자적인 시가를 읊어 회포를 풀었다. 중종대왕 때 시산군 · 강녕군과 함께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였고 백성(百姓)을 올바르게 잘 다스리도록 하는 글을 지어 밀봉 상소하였고 또 연명의 글로 억울하게 유배된 박상(朴祥) · 김정(金淨)의 석방을 상소하였다. 그당시 사람들은 중국 전한시대 학자(學者)이며 충신이었던 유향(劉向)에 비유하였다. 12세 때 기묘사화(己卯士禍)와 14세 때 신사무옥으로 큰 화를 입었다. 1542년(중종 37) 35세 때.. 2016. 8. 21.
(조선) 인성군 이공 [효민공], 해평군부인 해평윤씨 -전주이씨- 효민공 인성군 이공 휘는 공(珙), 호는 백인당(百忍堂), 시호는 효민(孝愍). 선조대왕의 7남으로서 정빈 민씨 소생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해서 선조대왕이 몹시 사랑했었다. 학업은 일취월장했고, 필법은 달관, 단정하고 힘이 있었다. 12세에 인성군에 봉해지고 사옹원 · 종부시 도제조와 종친부 유사의 책임을 겸했는데 사무 처리가 너그럽고 엄하며 공명정대하여 간사한 무리들이 범접하지 못했다. 또한 호령을 한번 내리면 모두들 두려워 했으며 광해군이 날로 꺼려했고 이이첨 등은 공의 인망을 시기하여 사형수에게 무고하도록 종용했다. 그래서 궐하에 석고대죄하고 죄를 기다린지 수 일만에 울분으로 병이 나서 3년을 일어나지 못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임금은 숙부로서 존경했다. 그러나 아직 .. 2016.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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