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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원군(관직)묘

(공신) 완남부원군 충정공 우재 이후원, 정경부인 광산김씨, 정경부인 영월신씨 -전주이씨-

by 보현당 2016.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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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남부원군 충정공 우재 이후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남항거사(南港居士). 아버지는 군수 욱(郁)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23년 인조반정에 참가해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지고 태인현감이 되었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출전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총융사(摠戎使)가 되었다. 1635년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지평을 지내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主和論)을 극력 반대하고, 청과의 강화과정에서 세자를 인질로 보내서는 안 된다고 극간(極諫)하는 등 척사론(斥邪論)을 펼쳤다. 효종이 즉위한 후 북벌계획에 앞장섰으며, 1650년(효종 1) 김자점이 효종의 북벌계획을 청에 밀고하자 그의 죄를 논해 부처(付處)하도록 했다. 1653년 도승지로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655년 예조판서로서 추쇄도감(推刷都監)의 제조(提調)가 되어 전국의 노비를 추쇄해 강화(江華)를 방비하게 했으며, 장악원(掌樂院)에 소장되어 있던 〈악학궤범 樂學軌範〉을 다시 간행해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게 했다. 이듬해 이조판서로 있을 때는 청탁하는 사람이 집에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등 공정한 인사에 힘썼다. 1657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1659년 자의대비(慈儀大妃) 복제문제가 일어나자 송시열과 함께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광주(廣州) 수곡서원(秀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 이다.

<<자료출처 :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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