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부원군 문성공 학역재 정인지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백휴(伯휴), 호는 학역재(學易齋), 시호는 문성(文成), 석성 현감(石城縣監) 흥인(興仁)의 아들. 권우(權遇)의 문인. 1411년(태종11) 생원(生員)이 되고, 141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예빈주부(禮賓注簿)·사헌감찰(司憲監察)·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낸 뒤 1418년(세종 즉위)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전임되었다. 그후 세종의 총애를 받아 예조와 이조의 정랑(正郞)을 거쳐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로 등용되고, 집현전 응교(應敎)에 이어 1425년(세종 7)에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에 올랐으며, 집현전 응교(應敎)에 이어 1425년(세종 7)에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에 올랐으며, 142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이해 좌필선(左弼善),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시강관(侍講官)을 겸임하고 1430년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었다. 이듬해 대제학 정초(鄭招)와 함께 대통력(大統曆)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지어 역법(曆法)을 개정했으며, 1432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지냈다. 이듬해 인수부윤(仁壽府尹)에 이어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로 있다가 1436년 부친상(父親喪)으로 사직했다. 1439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등용되어 이듬해 형조 판서에 승진, 이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1442년 예문관 대제학으로 「사륜요집(絲綸要集)」을 편찬, 1443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가 설치되자 제조(提調)를 지내고, 1445년 우참찬(右參贊)으로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진(撰進)했다. 예조 판서를 거쳐 1448년 이조 판서가 되어 삼남지방의 전품(田品)을 심사하여 토지의 등급을 정했고, 그후 공조 판서·좌참찬(左參贊)을 지내고 1452년(문종 2) 병조 판서에 전임, 1453년(단종 1)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을 도와 우의정에 승진,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졌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에 오르고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이 되었으며, 1458년(세조 4) 공신연(功臣宴)에서 불서(佛書)의 간행을 반대하다가 고신(告身)을 빼앗기고 부여(扶餘)에 부처(付處)되었다. 몇달 뒤 풀려나와 다시 부원군이 되었으며, 1465년 나이 70으로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궤장을 하사받았고, 1468년(예종 즉위)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다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원상(院相)으로서 서정(庶政)을 총괄,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이 되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 천문(天文)·역법(曆法)·아악(雅樂) 등에 관한 많은 책을 편찬했고, 김종서(金宗瑞) 등과 「고려사(高麗史)」를 찬수(撰修), 한편 세종을 도와 성삼문(成三問)·신숙주(申叔舟)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창제에 공이 컸으며, 권제·안지(安止) 등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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