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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원군(국구)묘

(숙종의 국구) 광성부원군 김만기 [문충공], 서원부부인 청주한씨

by 보현당 2012.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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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부원군 문충공 정관재 김만기

 

본관은 광산. 자는 영숙(永淑), 호는 서석(瑞石)·정관재(靜觀齋). 증조부는 형조참판을 지낸 장생(長生)이며, 아버지는 생원 익겸(益兼)이다. 인경왕후의 아버지인 숙부 익희(益熙)에게 수학하고,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 되었다. 1652년(효종 3)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고 수찬·정언·교리 등을 지냈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문제로 논란이 일어났을 때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했으며, 3년설을 제기한 남인 윤선도(尹善道)를 공격했다(→ 기해예송). 1671년(현종 12) 딸이 세자빈이 되었고, 1673년 영릉(寧陵)을 옮길 때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당상관이 되었으며, 그뒤 병조판서를 지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왕의 장인으로서 영돈녕부사에 승진하고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또한 총융사를 겸하여 병권을 장악했고,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대제학이 되었다. 1680년 경신대출척 때 훈련대장으로 끝까지 남인과 맞섰으며, 허적(許積)의 서자 견(堅)과 종실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의 역모를 막은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이 되었다(→ 삼복의 옥).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관직에서 쫓겨났다가, 뒤에 복직되었다.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서석집〉 18권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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