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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군)묘

(운현궁, 경기 남양주시) 흥친왕 우석 이재면[이희], 흥친왕비 풍산홍씨, 홍친왕비 여주이씨 - 전주이씨, 흥선대원왕-

by 보현당 2022.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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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제1대 고종의 형으로 이희공에 봉해진 왕족. 관료·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무경(武卿), 호는 우석(又石)이다. 고종의 형이며, 영선군(永宣君) 이준용(李埈鎔)의 아버지다. 순종의 명으로 이희(李熹)로 개명하였다.  1845년 7월 20일 서울에서 흥선군 이하응과 여흥 민씨(驪興閔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63년 사용(司勇)의 직을 맡았다가 1864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5월 규장각 대교(待敎)가 되었고, 예문관 검열(檢閱)·승정원 주서(注書) 등을 거쳐 1865년 동부승지·성균관 대사성·이조 참의·홍문관 부제학 등을 지냈다. 1866년 2월 도승지, 1867년 2월 규장각 직제학, 3월 이조 참판이 되었다. 1868년 1월 교정 당상(校正堂上)을 거쳐 1870년 7월 이조 참판, 9월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1878년 1월 형조판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가 되었으며, 1879년 1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임명되었다. 1880년 3월 병조 판서를 거쳐 1881년 금위대장, 판돈녕부사, 경리 통리기무아문 사대교린 당상(經理統理機務衙門事大交隣堂上), 시강원 좌빈객, 이조 판서를 지냈고, 1882년 3월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6월 호조 판서·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훈련대장을 겸하였다.

그 해 12월, 이미 7월에 청나라에 호송되어 톈진[] 보정부()에서 감금생활을 하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였다. 이듬해 3월 일시 귀국하였다가 5월 다시 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군을 봉양하였고, 1885년 4월 귀국 후 다시 세 번째로 청나라에 가서 8월 흥선대원군이 환국할 때 배종하였다. 그 뒤 약 10년간 운현궁에서 칩거하였다.

1894년 6월 흥선대원군이 다시 집정하자 통리기무아문()의 동문사 당상 경리사()가 되었다가 제1차 김홍집 내각() 때 궁내부 대신이 되었다. 1895년 8월 을미사변 후 제3차 김홍집 내각에서 다시 궁내부 대신을 맡았고, 총호사(使)를 겸하였다. 1900년 5월 완흥군()에 책봉되었고, 순종 즉위 직후인 1907년 9월과 10월에 각각 대훈이화대수장()·서성장()을 받았으며, 11월 육군 부장()이 되었다. 이 무렵 보빙대사(使)로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동화대수장()을 받았다. 1908년 11월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으로 참여하였고, 1909년 대한제국의 대훈금척대수장()을 받았으며, 1910년 6월 한일합병 실행 추진단체인 대한평화협회의 총재에 선임되었다.

이어 같은 해 8월 15일 흥친왕()에 봉해졌고,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 등 8명과 함께 황족대표로 어전회의에 참석하여 한일합병조약 체결에 동의하였다. 이 일로 인해 당시 미주 한인 언론으로부터 ‘9적’에 지목되어 지탄받았다. 8월 24일에는 순종의 명에 의해 이희()로 개명하였다.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 발효와 같은 날 일본 천황의 ‘조칙’에 의해 ‘이희공()’에 봉해졌다. ‘공위()’는 식민지 조선에만 존재하였던 특별한 제도로, 공위를 받은 자는 일본 황족의 예우를 받고 전하의 경칭이 붙여졌다. 또한 궁중 석차에서는 일본에서 왕의 하위와 공작의 상위에 자리하였으며, 그 예우는 후대에 세습되었다. 이듬해 1911년 1월 13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실에 설치한 교부장소에 출석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83만원의 은사공채권을 수령하였으며, 1912년 8월 1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2년 9월 9일 사망하여 그의 공위는 9월 25일 아들 이준용이 세습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재면 [李載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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