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는 전(힜). 자는 공근(公謹), 시호는 충희(忠僖). 성종대왕의 13남이며 배위는 찬성(贊成) 심순로(沈順路)의 딸과 찬성 정홍선(鄭弘先)의 딸 및 주부(主簿) 황징(黃徵)의 딸이다.
진성대군(후의 중종대왕)이 잠저에 있을 때 연산군이 사냥을 핑계삼아 가해하고자 할 때 공은 충성과 기지와 용기로써 화를 면하였다. 그 때의 일로 `사람과 말이 때에 응했다'라는 노래가 있었다 한다.
1506년(중종 1) 가을 중형인 회산군(檜山君)과 종사의 위급함을 걱정하고 창읍고사(昌邑故事)를 논하고 몇몇 중신들과 종사 회복을 위한 은밀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연산군이 성 밖으로 사냥갔다 환궁할 때, 공은 백관을 거느리고 화혜왕후(성종대왕 계비)의 명임을 일컬어 성문을 가로막고 연산군을 들이지 않았다. 결국 연산군은 교동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이어 중종대왕이 보위에 오르니 곧 중종반정이라 부르는 사실(史實)이다.
연산군 부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공은 회산군과 함께 임금께 아뢰고 교동으로 내려가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고 제사를 지내며 고유(告由)하는 말에서 “두 아우 염(恬), 전(힜)은 감히 백형 모관 부군께 말씀드립니다. 그 전날 울면서 간하였을 때에는 어찌 듣지를 않으시고 스스로 허물을 지으셨습니까. 비통함이 그지없습니다. 지극한 정은 살을 찢는 듯하고 옛 일을 돌이키며 지금을 생각하니 참으로 눈물 떨어짐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성문을 가로막고 죄를 따지며, 형을 놓아 보내고 아우를 세웠음은 마음이 어질지 않아서가 아니요 종사를 위함에서였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존령은 노여움과 원망함을 지니지 마시옵소서.”
1523년(중종 18) 의정부의 관노가 “박영문(朴永文) 등이 영산군을 추대하여 반란을 꾀한다.”는 밀고를 하여 조의가 분분했는데 이에 연루되어 결국 공은 그 해 9월에 황해도 배천 땅으로 귀양갔다. 귀양지에 있을 때에는 자전(慈殿)이 누차 다시 기용하라는 분부가 있었고 임금도 양의(良醫)를 보내주라는 하교가 있었다.
1527년(중종 22) 정언(正言) 이홍간(李弘幹)은 세종대왕이 양녕대군을 방면한 고사를 진언하자, 중종대왕은 “영산군의 해를 꿰뚫는 충성은 내가 익히 아는 바이니라.” 하고 방환케 하니 그 해 11월이다.
그 후 공은 북한산록 진관벽촌의 경치좋은 곳에서 지내다가 1538년(중종 33)에 세상을 마치니 향년 4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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