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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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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군)묘24

(중종) 복성군 이미 ?∼1533(중종 28). 조선 중기의 왕자.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미(嵋). 중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빈 순천&상주 박씨이다. 현감 윤인범(尹仁範)의 딸과 결혼하였다. 윤비가 세자(世子: 仁宗)를 낳고 죽은 뒤 경빈박씨는 아들을 세자로 책봉시키려는 야망을 가졌다. 마침 1527년(중종 22) 세자의 생일에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입·귀·눈을 불로 지져서 동궁(東宮)의 북정(北庭) 은행나무에 걸어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경빈박씨가 혐의를 받아 작호(爵號)를 빼앗기고 서인(庶人)으로 되어 귀양갔다가 1533년 모자가 함께 사사(賜死)되었다. 1541년(중종 36) 김안로(金安老)의 아들 희(禧)가 사건을 조작한 진범으로 밝혀져 신원(伸寃)되었다. * 인터넷의 근거도 없는 .. 2019. 11. 21.
(고종태황제) 완친왕 산남 이선[완화군] 완친왕[완화군] 완화군(재세 : 1868년 음력 윤4월 10일 ~ 1880년 음력 1월 12일)은 고종과 영보당 귀인 이씨의 아들로 1868년(고종 5)에 태어났다. 고종에게는 첫째 아들이 된다. 1876년(고종 13)에 완화군에 봉해졌으나, 1880년(고종 17)년에 1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대한제국 선포 후 1907년(융희 1)에 완친왕(完親王)에 추봉되었다. 2019. 3. 18.
(중종) 금원군 앙지 이영, 파징군부인 해주정씨 -전주이씨- 중종대왕의 3남으로 휘는 영(쫜), 자는 앙지(仰止)이다. 어머니 희빈(熙嬪) 남양홍씨는 경주(景舟)의 딸인데, 공은 희빈의 두 아들 중 큰 아들로 1513년(중종 8) 6월 9일에 태어나 1520년(중종 15)에 봉작을 받고 문소전(文昭殿) · 연은전(延恩殿)의 도제조(都提調), 사옹원(司饔院) 도제조, 종부시(宗簿寺) 도제조와 관종친부사(管宗親府事)를 겸임하다가, 1562년(명종 17) 4월 7일에 별세하니 향년 50세이다. 성품이 어질고 순하며 거짓이나 겉치레를 모르고,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서 자유생활을 즐겼지만, 여러 벼슬을 지내면서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배위는 파징군부인(波澄郡夫人) 정씨(鄭氏)로서 증 좌찬성 승휴(承休)의 딸인데 아들은 없고 1녀만이 있어 남관(南琯)에게 출가하였다. 2018. 10. 27.
(세조) 창원군 이성 [장소공], 덕양군부인 교하노씨, 광산군부인 광주정씨 -전주이씨- 창원군 장소공 이성 창원군(昌原君) [1455(세조 1)∼1505(연산군 11)] 휘는 성(晟), 시호는 장소(章昭). 세조대왕의 2남이며 덕원군의 아우이다. 어머니는 근빈(謹嬪) 박씨이다. 1464년(세조 10) 군으로 봉해지고, 1481년(성종 12) 소덕대부(昭德大夫)에 올랐다. 창원군은 군자의 기풍을 갖고 항상 효도하고 우애롭고 덕화(德化)의 도에 힘쓰고 여가에 문학을 익혔다. 1872년(고종 9) 영종정경에 추봉되었다. 창원군의 묘소는 시흥군 동면 팔애동 신림(현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병좌에 예장했었다. 그러나 실전되어 내려오다가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묘소부근에 살고 있던 윤씨들이 석물을 비롯하여 묘역을 마구 훼손하여 알아볼 수도 없게 만들어 놓았다. 이에 판윤 11대손 동현(東鉉)은 의.. 2016. 8. 21.
(세조) 덕원군 이서 [소간공], 임천군부인 경주김씨, 봉산군부인 함안유씨, 안성군부인 청주양씨, 창녕군부인 창녕성씨 -전주이씨- 덕원군 소간공 이서 덕원군의 휘는 서(曙), 자는 정수(晶첤)이며 호는 종덕암(宗德菴), 시호는 소간(昭簡)이다. 근빈 선산박씨에게서 태어났다. 세조대왕의 왕자이며 10세에 덕원군에 책봉되었다. 덕원군은 1455년(단종 3) 7세 때 어머니 근빈 박씨를 여의고 부왕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1462년(세조 8) 14살에 이미 혼인하여 사제(私第) 60여 칸을 하사받아 이 때부터 궁궐밖 건천동(乾川洞)에서 생활하였다. 효심이 지극하여 부왕을 정성껏 모셨으며 임금이 거둥시에는 항시 배행(陪行)하였다. 하루는 부왕이 온양온천에 행행할 때 종덕(宗德)에 잠시 머무르니 군이 부왕앞에 나가 이 곳 땅을 내려주실 것을 아뢰어 허락하니, 원래 이 곳은 나라에서 지표(地標)를 묻은 곳이라 이 곳 수구(水口)에 긴뚝을 쌓.. 2016. 8. 21.
(고종) 의친왕 만오 이강, 의친왕비 연안김씨 -전주이씨- 의친왕 만오 이강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1877년에 태어났다. 어머니 귀인 장씨는 의친왕을 낳고 명성황후의 박해를 피해 궁 밖에서 살다가, 1900년 숙원(淑媛) 칭호를 받고 1906년에야 겨우 귀인(貴人)에 봉해졌다. 귀인 장씨가 언제 죽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911년 묘소를 이장했다는 기록이 있어, 1906년과 1911년 사이인 것은 분명하다.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졌고, 1893년 12월 6일 김사준의 딸 김수덕(金修德)을 아내로 맞았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일본의 게이오 대학교를 거쳐 1900년, 미국으로 건너가 버지니아 주세일럼의 로어노크 칼리지와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및 하와이와 샌프.. 2016. 7. 21.
(조선) 인성군 이공 [효민공], 해평군부인 해평윤씨 -전주이씨- 효민공 인성군 이공 휘는 공(珙), 호는 백인당(百忍堂), 시호는 효민(孝愍). 선조대왕의 7남으로서 정빈 민씨 소생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해서 선조대왕이 몹시 사랑했었다. 학업은 일취월장했고, 필법은 달관, 단정하고 힘이 있었다. 12세에 인성군에 봉해지고 사옹원 · 종부시 도제조와 종친부 유사의 책임을 겸했는데 사무 처리가 너그럽고 엄하며 공명정대하여 간사한 무리들이 범접하지 못했다. 또한 호령을 한번 내리면 모두들 두려워 했으며 광해군이 날로 꺼려했고 이이첨 등은 공의 인망을 시기하여 사형수에게 무고하도록 종용했다. 그래서 궐하에 석고대죄하고 죄를 기다린지 수 일만에 울분으로 병이 나서 3년을 일어나지 못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임금은 숙부로서 존경했다. 그러나 아직 .. 2016. 4. 24.
(중종) 봉성군 이완 [의민공], 동래군부인 동래정씨 봉성군 의민공 이완 ?∼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종실. 중종의 여섯째아들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완(岏), 자는 자첨(子瞻). 희빈홍씨(熙嬪洪氏) 소생이며, 영의정 정유인(鄭惟仁)의 딸과 혼인하였다. 1545년(인종 1) 인종의 병사를 계기로 정세를 만회한 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 등은 정권의 기반을 굳히고자 을사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제거하고, 아울러 종친 중에서 명망이 있었던 봉성군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리하여 임백령(林百齡)은 때마침 하옥된 이덕응(李德應)을 위협하여 봉성군을 추대하여 역모를 꾀하였다고 거짓 자백하게 하여 죄를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왕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기는 “인종의 병이 위독할 때 윤임(尹任) 등이 봉성군으로서 왕위를 이으려고 하다가 형세가 .. 2015. 4. 3.
(성종) 회산군 이염 [정간공], 영원군부인 죽산안씨 회산군 정간공 이염 회산군(檜山君) [1481(성종 12)∼1512(중종 7)] 휘는 염(?舌), 호는 보익당(輔翼堂), 시호는 정간(貞簡). 현록대부(顯祿大夫)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올랐다. 모친 숙의(淑儀) 남양홍씨는 중추부사 집현전 제학 일동(逸童)의 딸이다. 숙의 홍씨는 7남 3녀를 낳았는데 공은 이 중 2남으로 1481년(성종 12) 12월 13일에 탄생하였다. 성종대왕은 여러 왕자 중 공을 특별히 사랑하여 스승을 골라서 가르치고자 정광필(鄭光弼)에게 명하니 정광필이 김굉필(金宏弼)을 추천했다. 그리하여 임금은 김굉필이 도학(道學)이 있다 하여 공을 예관(禮官)과 더불어 그에게 보내며 하교하기를 “고서(古書)에 이르기를 사람이 편히 살기만 하고 배움이 없으면 곧 금수에 가까울 것이로다. 그런 까.. 2014. 9. 25.
(성종) 견성군 이돈 [경민공], 영양군부인 평산신씨 견성군 경민공 이돈 견성군(甄城君) [1482(성종 13)∼1507(중종 2)] 휘는 돈(惇), 자는 근지(謹之), 시호는 경민(景愍). 성종대왕의 7남으로 어머니는 숙의(淑儀) 홍씨이며, 9세 때인 1491년(성종 22) 견성군에 봉해졌다. 1507년(중종 2) 26세 때 무고를 당해 강원도 간성으로 귀양갔다가 같은 해 10월 22일 적소 간성에서 사약을 받고 별세하였다. 배위는 증 좌찬성 우호(友灝)의 딸인 영양군부인(永陽郡夫人) 평산신씨이다. 슬하에 아들 두 명을 두었는데 장남은 완산군(完山君) 수함(壽탂)이고, 차남은 계산군(桂山君) 수계(壽誡)인데 회산군(檜山君)에게 후사로 출계하였다. 공의 집은 이현(梨峴)으로 창경궁 홍화문의 동남쪽에 있었다. 공이 사약을 받은 이유는 1507년(중종 2) 9.. 2014.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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