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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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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왕실)묘34

(인평대군 2자) 복창군 이정, 군부인 창원황씨 복창군 이정 휘는 정(楨), 대군의 2남으로 진하(進賀) 겸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청나라에 파견 되었으나 1680년(숙종 6)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하자 서인이 득세를 하게 되므로 1674년(현종 15)에 예론(禮論)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숙종으로부터 그다지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던 차 당시의 영의정 허적(許積)의 유악남용사건(油渥濫用事件)으로 왕은 더욱 남인들을 꺼려하게 되었다. 이 때 서인 중 김석주 · 김익훈 등이 허적의 서자인 허견(許堅)이 종실인 복창 · 복선 · 복평군 3형제와 같이 역모(逆謀)한다고 고발하여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복창군의 3형제와 허견 · 허적 · 윤휴도 죽음을 당하고 나머지 일파도 옥사(獄死) · 사사(賜死) 파직, 유배되었다. 이로써.. 2014. 10. 12.
(인평대군 장자) 복녕군 이욱 [효헌공], 양천군부인 양천허씨 효헌공 복녕군 이욱 복녕군(福寧君, 1639년 ~ 1670년 음력 10월 15일)은 조선 시대의 왕족이다. 인조와 인렬왕후 한씨의 3남인 인평대군의 장남이다. 또 고종은 복녕군의 직계 후손으로, 복녕군의 7세손이 된다. 효종이 즉위한 후인 1651년(효종 2년) 음력 6월 20일 정식으로 복녕군(福寧君)에 봉작되었다. 이후 1655년(효종 4년) 음력 4월 22일에 종실들에게 시행한 시험에서 합격을 하여 특별히 가자되고, 1662년(현종 3년) 음력 2월 14일에는 소덕대부(昭德大夫)가 가자되었다. 복녕군은 1670년(현종 11년) 음력 10월 15일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복녕군은 고종 즉위 후인 1864년(고종 원년) 음력 7월 9일 효헌(孝獻)의 시호를 받았다. 2014. 10. 12.
(완원대군) 개령군 개령군 이지 李枝(1349~1427)는 조선시대 전기의 文臣으로 度祖의 손자이며, 태조 이성계의 從弟이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中郞將이 되었고, 1392년 조선 개국과 함께 原從功臣이 되어 上護軍에 오른 뒤, 이·호·예조의 전서를 거쳐 順寧君에 봉하여졌고, 左廂軍士를 겸하였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귀향을 갔었으나 1400년 이방원이 즉위하면서 유배에서 풀려나 開寧君에 봉해졌다. 1414년(태종 14)에 領恭安敦寧府事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거쳐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2014. 2. 28.
(종친) 흥인군 이최응 [문충공] 흥인군 효헌공 산향 이최응 이최응(李最應, 1815년~1882년)은 조선 시대의 왕족으로 흥선대원군의 형이다. 자는 양백(良伯), 호는 산향(山響), 군호는 흥인군(興寅君)이다. 남연군과 군부인 여흥민씨의 셋재 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의 바로 윗 형이었다. 시호는 효헌(孝憲)이었다. 흥녕군과 흥완군의 동생이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친형이었으나, 그는 바로 아랫 동생 이하응에게 무시당했고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뒤에 명성황후는 그가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좋지 않은 점을 이용하여 그를 끌어들인다. 헌종 때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고종 즉위 후 1866년에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도감 당상이 되었다. 그뒤 판의금부사, 호위대장, 좌의정, 판종정경, 영의정 등을 거쳤으며, 1881년 통리기무아문의 총리대신에.. 2012.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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