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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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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5

(광해군의 국구) 문양부원군 류자신, 봉원부부인 동래정씨 -문화류씨- 문양부원군 류자신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외척이다. 본관은 문화이고 자는 지언(止彦)이다. 공조판서 유잠(柳潛)의 아들이며 광해군의 장인이다. 이담(李湛)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입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후 태릉참봉, 돈령부직장, 내자시주부, 평강현감, 호조좌랑, 김포현령, 형조정랑, 김제군수, 장악원첨정 등을 지냈다. 1587년 셋째 딸을 왕자의 부인으로 들여보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안악현감으로 나가 해서(海西)의 가담자와 연루자들을 색출, 잡아들였으며, 이후 광주목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광해군을 수행하였다. 그 후 돈령부동지사를 거쳐 외직인 성천부사,개성부 유수,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하고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냈으며, 160.. 2021. 7. 14.
(15) 광해군묘(光海君墓) - 광해군(光海君), 문성군부인(文城君夫人) 문화류씨 광해군(光海君, 1575년 6월 4일 (음력 4월 26일) ~ 1641년 8월 7일 (음력 7월 1일)[1])은 조선의 제15대 임금이다. 성은 이(李), 휘는 혼(琿),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었고,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으는 데에도 힘썼다. 임진왜란 동안 세자의 몸으로 부왕을 돕고 전쟁 승리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부왕의 인정과 칭찬은 커녕 견제와 냉대를 당해야만 했다. 임진왜란 이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며, 후금과의 전쟁 위기 상황에서 실리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2015. 11. 25.
(14) 성묘(成墓)[[廢] 성릉(成陵)] - 공빈김해김씨 [[廢]공성왕후(恭聖王后) 김해김씨] 공빈 김해김씨 공빈 김씨(恭嬪 金氏, 1553년~1577년 음력 5월 27일)는 조선의 제 14대 왕 선조(宣祖)의 후궁이자 추존왕후이며 임해군(臨海君), 광해군(光海君) 형제의 생모이다. 김해인 사포 김희철의 딸로, 궁인으로 입궐하여 선조의 승은을 입은 뒤 내명부 정 3품 소용(昭容)이 되었다. 종 2품 숙의(淑儀)로 있을 때에 선조의 장남인 임해군을 낳아 종 1품 귀인(貴人)에 봉해졌고, 차남인 광해군을 낳자 마침내 정 1품 빈(嬪)에 책봉되었다. 아버지 김희철은 후일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전사하였다. 광해군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후로 추존되어 자숙단인공성왕후(慈淑端仁恭聖王后)의 시호와, 성릉(成陵)의 능호가 올려졌으나 광해군 폐위 후 시호 및 능호는 모두 삭탈되었다. 2013. 8. 24.
(15) 광해군묘(光海君墓) - 광해군(光海君),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문화류씨 광해군(光海君) 1575년~1641년 (선조8년~인조19년) 휘 혼(琿). 선조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공빈김씨(恭嬪金氏)이다. 비(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당시 조정에서는 공빈김씨 소생의 임해군(臨海君) 진(珒)을 세자로 삼으려 했으나 광패(狂悖)하다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그뒤 1591년(선조 24) 정철(鄭澈)을 비롯한 대신들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건의를 올렸으나, 선조가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을 총애하여 책봉이 지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서울을 떠나게 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고,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국사권섭(國事權攝:임시로 나랏일을 맡아봄)의 권한을 받았.. 2013. 8. 24.
(15대) 광해군묘 - 광해군, 문성군부인 문화류씨 [사적 제363호] 광해군(光海君),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광해군(光海君, 1575년 음력 4월 25일~1641년 음력 7월 1일)은 조선의 제15대 임금이다. 휘는 혼(琿). 선조(宣祖)와 공빈 김씨(恭嬪 金氏)의 둘째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었고,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으는 데에도 힘썼다. 임진왜란 동안 세자의 몸으로 부왕을 돕고 전쟁 승리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부왕의 인정은커녕 견제와 냉대를 당해야 했다. 임진왜란 이후 우여곡절 끝에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듯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며, 후금과의 전쟁 위기 상황에서 실리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 2012.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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