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여흥민씨30 (문신) 충익공 기재 박동량, 정경부인 여흥민씨 -반남박씨- 충익공 기재 박동량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룡(子龍), 호는 기재(寄齋)·오창(梧窓)·봉주(鳳洲). 조년(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소(紹)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응복(應福)이며, 어머니는 선산 임씨(善山林氏)로 구령(九齡)의 딸이다.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 이듬 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되어 검열, 호조·병조의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병조좌랑으로 왕을 의주로 호종(扈從)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해 의주에 주재하는 동안 왕이 중국의 관원이나 장수들을 만날 때는 반드시 곁에서 시중해 대중 외교(對中外交)에 이바지했으며, 왕의 신임도 두터웠다. 이듬 해 동부승지·좌승지를 거쳐 다시 도승지에 이르렀다. 1596년 이조참판으로 동지사(冬.. 2016. 7. 2. (선조) 정빈 여흥민씨 정빈여흥민씨 정빈 민씨(靜嬪 閔氏, 1567년 ~ 1626년)은 선조의 후궁으로 본관은 여흥이다. 강화 도호부사 민사준(閔士俊)의 딸로 성종의 사위인 여천위(驪川尉) 민자방의 증손녀이다. 1580년(선조 13년) 음력 5월 26일 종2품 숙의(淑儀)로 정식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이때 간원이 민씨의 출신이 성종의 외손 집안이니 선발에서 제외하라고 간하였지만 선조가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홍여겸(洪汝謙)의 딸(훗날의 정빈 홍씨), 정순희(鄭純禧)의 딸과 함께 숙의가 되어 입궁하였으며 민씨는 수진방(水眞坊)에 있는 궁으로 옮겨졌다. 이후 소의, 귀인을 거쳐 정1품 빈(嬪)에 봉해졌다. 선조와의 사이에서 인성군 외에 딸 셋과 아들 둘을 낳았다. 인성군은 1624년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되었고 1626년 정빈 민씨.. 2016. 4. 24. (문신) 문산 이재의, 유인 여흥민씨 -전주이씨- 문산 이재의 재의(載毅) [1772(영조 48)∼1839(헌종 5)] 자는 여홍(汝弘), 호는 문산(文山). 주국 대장의 증손이며 응오(?五)의 아들이다. 1801년(순조 1) 생원시에 3등으로 급제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문집이 있다. 배위는 여흥민씨 참봉 지혁(志爀)의 딸이다. 2016. 2. 3. (문신) 차호 민암, 정경부인 경주김씨, 정경부인 해주정씨 차호 민암 1636(인조 14)~ 1694(숙종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 자는 장유(長孺), 호는 차호(叉湖). 아버지는 이조참판 응협(應協)이다. 1668년(현종 9)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지평·승지·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678년(숙종 4) 당시 인조반정에 대한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기 위한 변무부사(辨誣副使)로 복평군연(福平君 연)과 함께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1680년 대사헌으로 있다가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대거 실각하자 파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기용되어 대사헌·대제학·병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김수항(金壽恒)·송시열(宋時烈) 등 서인들의 처형 문제에 강경론을 주장했다. 1691년에는 우의정에 올랐으며,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4년 김춘택(.. 2014. 9. 26. (문신) 묵재 허적 [숙헌공], 정경부인 광주이씨, 정경부인 여흥민씨 - 탁남 숙헌공 묵재 허적 1610(광해군 2)~ 1680(숙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남인으로 제1·2차 예송에서 서인과 대결했으며, 제2차 예송에서 승리하여 집권한 뒤 탁남(濁南)의 영수가 되었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여차(汝車), 호는 묵재(默齋)·휴옹(休翁). 아버지는 부사 한(僩)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를 거쳐 163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검열·홍문관부수찬을 지냈다. 1641년 의주부윤으로 관향사(管餉使)를 겸했다. 1645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는데, 1647년 일본의 사신 다이라[平成辛]를 위법으로 접대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기용되어 1653년(효종 4) 호조참판, 1655년 호조판서를 거쳐 1659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해 효종이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2014. 9. 26. (문신) 운미 민영익, 정경부인 광산김씨 운미 민영익 조선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 자는 우홍(遇鴻) 또는 자상(子相)이고, 호는 운미(芸楣)·죽미(竹楣)·원정(園丁)·천심죽재(千尋竹齋)이며, 사호(賜號)는 예정(禮庭)이다. 민태호(閔台鎬)의 아들로 1874년(고종 11) 폭탄 테러에 의해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양오빠 민승호(閔昇鎬)와 그의 아들이 죽자 양자로 입양되어 죽동궁(竹洞宮)의 주인으로서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 노릇을 하였다. 187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조선 역사상 최연소인 19살의 나이로 정3품 당상관인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1881년 경리통리기무아문 군무사당상, 별기군의 교련소당상으로 별기군의 실질적인 운영 책임을 맡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대인 별기군은 급료나 피복 지급 등 모든 면에서 구식 군대보다 대우가 월.. 2012. 11. 9. (숙종의 장모) 풍창부부인 풍양조씨 풍창부부인 풍양조씨 방형의 분묘 앞 좌측에는 묘비, 중앙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 그리고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 등의 석물이 각기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영조 17년(1741)에 건립한 것으로 비문의 음기는 외손인 이재짓고, 글씨는 해서체로서 손자 민우수가 썼다. 묘비는 화강암의 옥개석과 장방형의 대석을 갖추 었고, 오석의 비신은 높이 178㎝, 폭 78㎝, 두께 28.5㎝의 규모이다. 풍창부부인 조씨(1659-1741)는 조선 숙종비 (인현왕후)의 친정어머니이며,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아내 이다. 본관은 풍양이다. 효종 10년(1659) 성균관 생원 조귀중과 청주한씨 사이에서 태어나 18세인 숙종 2년(1676) 민유중에게 출가했고, 딸이 숙종의 계비로 간택되자 외명부 정 1품인 부부인의 작위를 받았다.. 2012. 9. 19. (숙종의 국구) 여양부원군 민유중 [문정공], 해풍부부인 덕수이씨, 은성부부인 은진송씨 여양부원군 문정공 둔촌 민유중 1630년(인조 8)∼1687년(숙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 숙종의 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이다. 강원도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의 막내아들이며, 모친은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대사헌 민기중(閔蓍重)과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의 동생이다. 1649년(효종 즉위) 진사가 되고, 165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대교‧봉교‧세자시강원설서‧성균관전적을 거쳐 사헌부감찰‧예조좌랑‧병조좌랑을 지내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상을 마친 뒤 사간원정언과 세자시강원사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1656년 병조정랑이 되었다. 그뒤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 등을 지내면서 .. 2012. 9. 19. (문신) 복경 민승호[충정공] 충정공 복경 민승호 1830년(순조 30)∼1874년(고종 11). 조선 말기의 척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복경(復卿). 민치구(閔致久)의 아들로, 민치록(閔致祿)에게 입양되었으며,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오빠이다.1864년(고종 1)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66년 여동생이 왕비로 책봉되자 중용되어 그해 8월 이조참의, 1867년 1월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872년 형조판서가 되고, 1873년 병조판서에 올랐다.이무렵 서계(書契) 문제로 일본 메이지정부(明治政府)의 국교요청이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국서수리거부정책으로 나타나자, 이에 반대하여 ‘국서를 거절함으로써 일본의 분노를 사게 된다면 반드시 후환이 있음은 물론이요, 양국이 상호 제휴하여 문명개화할 수도 없을 것’임을 통찰한 나머지 이.. 2012. 9. 17. (문신) 좌찬성 정충경, 정경부인 여흥민씨 전라도 관찰사 중추원부사 증 의정부 좌찬성 정충경 ?~1443 정도공 역(易)의 맏아들이며 영양위 종(悰)의 아버지. 음직으로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출생연대 성장과정 및 초기관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1438년 동부승지, 1440년 우부승지 이듬해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그 이듬해 한성부윤에 임명되어 중국에 사신 갔다 오고 1443년 전라도 관찰사 중추원부사로 재임하던 중 별세.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2012. 9. 4. 이전 1 2 3 다음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