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릉(穆陵)
선조(宣祖), 의인왕후(懿仁王后) 반남박씨
- 재위기간 : 1567년 ∼1608년 선조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1552년(명종 7) 11월 11일 한성 인달방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바르고 용모가 빼어나 순회세자를 잃고 후사가 없었던 선왕 명종의 사랑을 받았다. 처음에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1567년(명종 22) 명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그해 7월 3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매일 경연에 나가 토론하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여 제자백가서를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선조는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이황, 이이 등 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다.『유선록』, 『근사록』, 『심경』, 『소학』, 『삼강행실』등을 편찬케 하여 유학을 장려하는 한편,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에게 증직하는 등 억울하게 화를 입은 사림들을 신원하고, 그들에게 화를 입힌 남곤 등의 관작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했다. 그러나 세자책봉 문제 등을 둘러싸고 정국을 주도하던 사림들 사이에 당쟁이 극심해졌으며, 국력이 쇠약해져 국방대책을 세우지 못하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에 이어서는 정유재란이 일어나 두 차례에 걸친 7년 동아의 전쟁을 치르며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선조는 전후 복구작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 의인왕후는 반성부원군 박응순의 딸로 1569년(선조 2)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를 행하였다.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침착하고 자애로운 면모를 지녔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후궁의 자식들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폈다. 특히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남달리 총애하여 마치 자신이 낳은 친아들처럼 대해주었고, 훗날 그가 세자의 자리로 오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광해군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에 정세는 안정을 찾아갔으나, 의인왕후는 피난길에서 얻은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46세의 일기로 황화방 별궁에서 승하하였다. 선조 33년 6월 24일조의 실록에는 “별로 아픈 곳은 없으나 음식이 먹고 싶지 않고 밤엔 잠을 잘 수 없으며 온 몸이 나른하여 앉으나 누우나 편안하지 못하다. 음식을 대하면 구토부터 먼저 나고 숨이 가쁘며 목에서 가르릉 거리는 소리가 조금 나고 맥은 부하여 한 번 숨 쉬는 동안 7번이나 뛴다. 아마도 원기가 부족한 탓으로 비(脾), 폐(肺), 심(心) 세 기관이 병난 듯하다.”는 의인왕후의 병세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자식이 없던 그녀를 무시하던 선조는 “중전의 목숨을 이미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나는 실로 망극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밖에서 속히 일을 준비하도록 하라.”라고 빈청의 대신들에게 전교하며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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