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남인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고종태황제 후궁 보현당 귀인정씨]
[서삼릉 후궁묘역 보현당 귀인정씨 묘]
보현당 귀인정씨 고종태황제의 후궁이시다. 언제 어떻게 입궁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없지만, 필자의 고모(2004년 작고)님께서 이야기해주 신 내용을 적고자 한다. 조선 후기,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때 우리 집안은 고난의 역사였다. 보현당정씨의 부친께서는 이름은 정확하게 알지 못하나 정방지거 세례명이 전하고 있다. 조부께서는 정화이시며 조모의 성명 또한 미상이시다. 이렇게 된 배경은 천주교랑 연관이 있다. 조부와 부친께서는 강원도와 경기도 양평에 숨어 살면서 화전 밭을 일구며 근근하게 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보현당정씨는 익정공 정운유할아버지 후손이다. 익정공 할아버지께서는 여주목사와 공조판서를 지내셨다. 후에 정조께서 익정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셨다. 익정공께서 3남 2녀를 두셨는데 모두 남인가의 후손들과 통혼을 하셨다. 그중 3남 옹약 정순조의 후손이시다. 언제 어떻게 천주교를 받아 들였는지에 대한 내용 또한 자세한 것이 없지만, 황사영백서에 보면 누님 되시는 정헌 이가환의 배위 정씨께서 열심히 하는 신자라는 대목으로 보아 그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다니시며 힘들게 사셨다고 한다. 그 후 정착한 곳이 지금의 숭인동인데 그곳에서 보현당정씨와 형제들이 태어나셨다고 한다.
其妻素有信根 勸化女婦妾婢 或書冊綻露 家煥不爲査禁 戊午己未之間 聞外鄕窘難迭起 密謂其所信曰 此事譬如以杖擊灰 愈擊愈起 主上雖欲禁止 終當無奈何矣
그런데 그의 아내가 본래 성교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어서, 딸과 며느리와 첩과 여종을 권유하여 감화시켰는데, 혹 성교에 관한 책이 탄로 나도 가환은 조사하고 금지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무오년과(1798) 기미년(1799) 사이에 그는 지방에서 박해가 잇달아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은밀히 자기의 소신을 말하기를, "이것은 비유하면 막대기로 재를 두드리는 것과 같아, 치면 칠수록 더욱더 일어나는 법이오. 주상께서 아무리 금하려고 하시나 끝내는 어찌할 수 없을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황사영백서 원문내용]
* 여기서 그의 아내는 이가환의 배위 정부인 해주정씨를 뜻 함.
[보현당 귀인해주정씨 묘표]
- 순부 6권, 8년( 1915 을묘 / 일 대정(大正) 4년) 8월 20일 양력 1번째기사
덕수궁의 궁인 정씨가 왕자를 낳다
덕수궁(德壽宮)의 궁인(宮人) 정씨(鄭氏)가 왕자(王子)를 탄생하였다.
- 순부 6권, 8년( 1915 을묘 / 일 대정(大正) 4년) 8월 20일 양력 2번째기사
태왕 전하가 보현당에 나가 이준 공과 종척, 귀족을 인견하고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다
보현당(寶賢堂)에 임어(臨御)하여 이준 공(李埈公) 및 종척(宗戚), 귀족(貴族)을 소견하였다. 왕자(王子)의 탄생을 축하하였기 때문이다.
- 순부 7권, 9년( 1916 병진 / 일 대정(大正) 5년) 7월 25일 양력 1번째기사
왕자 이우가 죽다 왕자 이우(李堣)【덕수궁(德壽宮) 궁인(宮人) 정씨(鄭氏)에게서 태어났다.】가 서거하였다.
- 순부 7권, 9년( 1916 병진 / 일 대정(大正) 5년) 7월 29일 양력 1번째기사
왕자 이우의 장례를 치르다 왕자 이우(李堣)를 마장리(馬場里)【유릉(裕陵) 왼편에 있다.】에 장사지냈다.
[서삼릉 왕자묘역에 있는 황자 이우 묘]
후에 1909년 보현당 귀인정씨 동생인 정창교가 돌아가셨다. 친정 조카가 있는데 몇 년 동안 돌보지 못하다. 언제인지는 모르나 고아로 자라고 있던 조카를 찾아가 대성통곡하셨다고 한다. 1918년에 진정 조카 혼례를 주선하셨다고 한다. 김해김씨 김용선의 딸로 배필을 맞이하셨다. 1926년에 조카마저 죽었다. 그때 증조모께서 보현당 정씨를 보셨다고 한다. 그 뒤로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는 알 수 없다. 생명이 위협받을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 가족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셨던 보현당 정씨 우리는 대고모님의 희생을 늘 기억하고 있다. 내가 묘지 답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과연 그 분의 묘가 있을까 생각했다. 서삼릉 후궁묘역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반가운 마음에 찾아갔지만, 참배를 허락할 수 없다는 관리소직원과 크게 싸운적이 있다. 그땐 문화재관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지 못하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범했다. 해주정씨의 처음이자 마지막 후궁이신 보현당 대고모님, 대고님께서 남기신 고종태황제 어진이 남아 있다. 기타 왕실사진도 2점이 있었는데 어떤 식으로 분실이 되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고종태황제 어진과 보현당정씨 묘표]
* 증조부께서 병환이 깊으셨을 때 일인데, 조부님께서 6살 때 아침 일찍 지금의 청량리에서 마차를 타고 양주땅(현 남양주로 추정)에 가시면 점심 전에 도착하셨다고 한다. 큰 기와집에 가셨는데 그곳에 갓을 쓰고 곤방대에 담배를 피우셨던 어르신이 계셔서 할아버지 했더니 그분께서 난 네 큰아버지라고 하셨다고 한다.
(보현당 귀인정씨 다른 자료 보기 : http://madangca.blog.me/30078559586)
(위키백과 내용 보기 : http://ko.wikipedia.org/wiki/%EB%B3%B4%ED%98%84%EB%8B%B9_%EC%A0%95%EC%94%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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