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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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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신씨16

(문신) 해성군 송촌 정흠, 정부인 평산신씨 -해주정씨- 증 호조판서 겸 동지의금부사 행 돈녕부판관 해성군 송촌 정흠 1557년(명종 12)∼1635년(인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흠재(欽哉), 호는 송천(松泉). 증조부는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尾壽)이고, 조부는 해림군(海林君) 정승휴(鄭承休)이며, 부친은 해녕군(海寧君) 정원희(鄭元禧)이다. 벼슬은 토목영선(土木營繕)의 일을 맡아보는 선공감참봉(繕工監參奉)을 거쳐 1604년(선조 37)에 대흥현감(大興縣監)이 되었다. 그 후 양천현감(陽川縣監)‧문화현감(文化縣監)‧돈령부판관(敦寧府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호조판서(戶曹判書)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고 해성군(海城君)에 봉해졌다. 묘는 남양주 진건면 사능리 사릉 경내에 있다. 2016. 7. 18.
(문신) 남녕군 나재 홍명구[충렬공], 정경부인 평산신씨 -남양홍씨- 남녕군 충렬공 홍명구 1596년(선조 29)∼1637년(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원로(元老), 호는 나재(懶齋). 참의 홍서익(洪瑞翼)의 아들이다. 8세에 능히 시를 지으니 이항복(李恒福)‧신흠(申欽) 같은 선비들이 칭찬하고 장차 큰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알성문과에 장원하였으나 시골에 은거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후에 등용되어 1625년 부수찬이 되고, 1627년 직강을 거쳐 교리‧이조좌랑‧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1633년 우승지가 되고, 1635년 대사간‧부제학을 거쳐 이듬해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이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자모산성(慈母山城)을 지키다가, 적병이 이미 평양을 지났고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근왕병(勤王兵.. 2016. 1. 26.
(성종) 견성군 이돈 [경민공], 영양군부인 평산신씨 견성군 경민공 이돈 견성군(甄城君) [1482(성종 13)∼1507(중종 2)] 휘는 돈(惇), 자는 근지(謹之), 시호는 경민(景愍). 성종대왕의 7남으로 어머니는 숙의(淑儀) 홍씨이며, 9세 때인 1491년(성종 22) 견성군에 봉해졌다. 1507년(중종 2) 26세 때 무고를 당해 강원도 간성으로 귀양갔다가 같은 해 10월 22일 적소 간성에서 사약을 받고 별세하였다. 배위는 증 좌찬성 우호(友灝)의 딸인 영양군부인(永陽郡夫人) 평산신씨이다. 슬하에 아들 두 명을 두었는데 장남은 완산군(完山君) 수함(壽탂)이고, 차남은 계산군(桂山君) 수계(壽誡)인데 회산군(檜山君)에게 후사로 출계하였다. 공의 집은 이현(梨峴)으로 창경궁 홍화문의 동남쪽에 있었다. 공이 사약을 받은 이유는 1507년(중종 2) 9.. 2014. 9. 13.
(문신) 해성군 정흠, 정부인 평산신씨 호조판서 겸 동지의금부사 해원군 흠재 정흠 1557년(명종 12)∼1635년(인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흠재(欽哉), 호는 송천(松泉). 증조부는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尾壽)이고, 조부는 해림군(海林君) 정승휴(鄭承休)이며, 부친은 해녕군(海寧君) 정원희(鄭元禧)이다. 벼슬은 토목영선(土木營繕)의 일을 맡아보는 선공감참봉(繕工監參奉)을 거쳐 1604년(선조 37)에 대흥현감(大興縣監)이 되었다. 그 후 양천현감(陽川縣監)·문화현감(文化縣監)·돈령부판관(敦寧府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호조판서(戶曹判書)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고 해성군(海城君)에 봉해졌다. 2014. 4. 10.
(문신) 시가 김이중, 정경부인 평산신씨, 정경부인 함평이씨 시가 김이중 조선 정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시가(時可)이고 김달행(金達行)의 아들이다. 진사에 합격 후 출사하여 서흥부사를 지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삼산재김선생간첩(三山齋金先生簡帖)』에 4건의 간찰이 전하고 있다. 2014. 3. 31.
(문신) 덕형 이원수 , 정경부인 평산신씨 [신사임당] 덕형 이원수 - 본관은 덕수. 자는 덕형(德亨). 아버지는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된 이천(李蕆)이고 부인은 신사임당이며, 율곡 이이(李珥)의 아버지이다. 50세가 되던 해에 음직(蔭職)으로 수운판관(水運判官)에 임명되었고, 그 후 내섬시(內贍寺) 주부(主簿)·종부시(宗簿寺) 주부·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다. 당숙 이기(李芑)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그의 휘하에 잠시 있었다. 이기는 1545년(인종 1)에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입혔던 사람이다.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이기의 영광이 오래 갈 수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부인 신사임당의 권유를 받아들여 을사사화 당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 사임당.. 2012.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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