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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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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당의 묘지기행783

(문신, 경북 안동시) 자형 김영추, 숙부인 해주정씨 -안동김씨- 자(字)는 자형(子衡)이다. 1471년 성종2년 경주(慶州) 판관(判官)을 시작으로 음보로 벼슬길에 나섰다. 군적 낭청(軍籍郞廳)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 정랑(正郞) 합천군수(陜川郡守)등을 역임한후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해주정씨(海州鄭氏)인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정충석(鄭忠碩)의 6남 3녀중 셋째딸이다. 공(公)의 처가가 예천군 용문면 구계리에 있어서 공(公)도 이곳으로 이주해 살았다. 1490년 성종21년에는 학조대사가 합천군의 속현인 야로현(冶爐縣)의 학전(學田)을 불전(佛田)으로 바꾼 사건이 일어났을때 합천군수로 재직중이었다. 2022. 12. 16.
(영화배우) 최은희 -해주최씨- 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배우 최은희는 1942년 연극 을 통해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연극계에서 활약하던 고인은 1947년 로 스크린에 데뷔한 뒤 , 등에 출연하면서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1950~60년대 트로이카로 부상했다. 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를 통해 만난 신상옥 감독(2006년 타계)과 결혼한 뒤 (1955), (1955), (1961), (1963) 등 약 13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또한 1967년 안양영화예술학교를 설립해 교장 겸 이사장을 맡았고, 극단 배우극장을 직접 운영하며 후배 연기자들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1976년 신 감독과 이혼한 최은희는 1978년 1월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납치됐으며, 신 감독도 그해 7월 납북되면서 두 사람은 1983년 .. 2022. 12. 14.
(영화감독) 신상옥 -평산신씨 해방 이후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연산군」, 「빨간마후라」 등의 작품에 관여한 영화인.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본명은 신태서(申泰瑞)이다. 학생시절 미술을 전공했다. 경성중학교(鏡城中學校) 2학년 시절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고, 1944년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했으나 1945년 징병을 피해 조선으로 돌아왔다. 8·15 광복 후 영화감독 최인규 문하에서 일했다. 1949년 독립하여 영화감독 겸 제작자로 활동했다. 데뷔작인 「악야」는 전쟁으로 1952년 개봉되었다. 1954년 「코리아」를 제작하며 알게 된 배우 최은희와 결혼했다. 이후 신상옥프로덕션을 운영하며 「꿈」(1954),「젊은 그들」(1955),「무영탑」(1957),「지옥화」(1958),「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2022. 12. 14.
(문신, 경기 여주시) 양도공 범숙 최사의, 정경부인 순천박씨 -전주최씨- 조선전기 지돈녕부사, 동지중추부사,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범숙(範叔). 아버지는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최유경(崔有慶)이고, 어머니는 고려평장사(高麗平章事) 김묘(金昴)의 딸이며, 부인은 밀직부사(密直副使) 박가흥(朴可興)의 딸이다. 고려말에 부음(父蔭)으로 출사하였다. 1393년(태조 2) 형조의랑(刑曹議郞)으로서 실행(失行)한 세자빈 유씨의 죄를 청한 일로 태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하였다. 1426년(세종 8)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임명되고, 다음 해 이조참의를 거쳐 종2품계에 오르면서 삼군부우군동지총제(三軍府右軍同知摠制)에 승직하였다.이어 1441년까지 호조참판(戶曹參判)·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동지총제·중군총제·개성부부유후(開城府副留後)·예조좌.. 2022. 12. 13.
(문신, 경기 남양주시) 삼수헌 이하조, 의인 안동김씨 -연안이씨- 1664년(현종 5)∼1700년(숙종 26).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낙보(樂甫), 호는 삼수헌(三秀軒). 아버지는 부제학 단상(端相)이며, 어머니는 우의정 이행원(李行遠)의 딸이다. 1682년(숙종 8)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大科)를 단념하고 경사(經史)를 탐독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 되어서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그는 삼수헌을 지어놓고 10여년 동안 자연 속에 묻혀 지내다가 음보로 기용되어, 1694년에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으며, 이어 사복시주부·공조좌랑을 지내고, 1698년에 부평현감으로 나가 치적이 높았으나 37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2022. 12. 12.
(문신,경기 남양주시) 문정공 정관재 이단상 , 정부인 전의이씨 -연안이씨- 1628년(인조 6)∼1669년(현종 10).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서호(西湖). 좌의정 이정구(李廷龜)의 손자로, 대제학 이명한(李明漢)의 아들이다.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장원, 다음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대교·봉교·부수찬·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서연(書筵)에 나아갔다. 여러 차례 이조·병조의 정랑을 지내고 의정부사인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1655년(효종 6)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대간에 들어가 구애됨이 없이 정론(正論)을 밝혔으며, 전라도 지방을 두루 살펴 기근이 심한 고을을 구제하게 하였다. 그뒤 효종이 죽고 정국이 변하자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잠시 청풍부사를 지냈으며, 이어 응교를.. 2022. 12. 12.
(문신, 경기 남양주시) 매헌 권우, 정부인 남양홍씨 -안동권씨- 조선전기 원주목사, 예문관제학, 세자빈객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권원(權遠), 자는 중려(仲慮)·여보(慮甫), 호는 매헌(梅軒). 아버지는 검교정승(檢校政丞) 권희(權僖), 어머니는 한양한씨(漢陽韓氏)로 정승 한종유(韓宗愈)의 딸이다. 어려서는 형인 권근(權近)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자라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377년(우왕 3) 진사가 되고, 1385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문첩녹사(文牒錄事)가 되고, 이어 성균박사·밀직당(密直堂)·장흥고사(長興庫使)·군기주부(軍器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1390년(창왕 2) 액정알자감(掖庭謁者監)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고, 이듬 해 이조좌랑을 거쳐 군자감승(軍資監丞)을 역임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계속 .. 2022. 12. 11.
(공신, 충북 음성군) 길청부원군 양촌 문충공 권근, 숙경택주 경주이씨 -안동권씨,좌명공신- 조선전기 중추원사, 정당문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권진(權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소오자(小烏子). 권보(權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권고(權皐), 아버지는 검교정승 권희(權僖)이다. 1368년(공민왕 17)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해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와 화친함)을 주장했으며,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성균관대사성·지신사(知申事) 등을 거쳐, 1388년(창왕 즉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은(李垠) 등을 뽑았다. 이듬해 첨서밀직사사(簽書.. 2022. 12. 10.
(덕원군 파, 경기 양주시) 숭선군 마재 문헌공 이취, 군부인 진주강씨, 군부인 창녕조씨 -전주이씨- 숭선군(嵩善君) [1488(성종 19)∼1544(중종 39)] 휘는 취(), 자는 종지(淙之), 호는 마재(磨齋), 시호는 문헌(文憲). 덕원군의 4남이며 작호는 창선대부 행 숭선부정 증 승헌대부 겸 오위도총관이며, 초수는 숭선부정이었다가 1717년(숙종 43)에 숭선군에 봉해졌다. 배위는 군부인(郡夫人) 진주강씨로 1485년(성종 16)에 태어나 1527년(중종 22)에 별세하였다. 반성위(班城尉) 자순(子順)의 딸이며 숭선군이 유배지에 있을때 말(馬)을 사다 울안에서 타는 연습을 하여 남장을 하고 숭선군이 있는 개령(開寧)에 가서 돌아갔다. 공은 타고난 용모가 준수하고 학문 탐구에 심혈을 기울여 정학(正學)을 하며 육예(六藝)에 능통하였으며 선기(璿璣)의 제도를 저술하였다. 충효를 숭상하여 당시 현유.. 2022. 12. 9.
(문신, 경기 양주시) 수허재 충간공 홍계적, 정부인 성주이씨 -남양홍씨- 1680(숙종 6)∼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혜백(惠伯), 호는 수허재(守虛齋). 홍처후(洪處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수환(洪受渙)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홍우석(洪禹錫)이며, 어머니는 이중린(李仲獜)의 딸이다. 1702년(숙종 28) 진사가 되고 이듬 해 성균관 유생 180인과 함께 박세당(朴世堂)을 성토하는 소(疏)를 올렸다. 그로 인해 이경석(李景奭)의 손자인 하성(廈成)으로부터 소척(疏斥)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해 6월 태학생으로서,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과 이경석의 비문을 수입한 뒤 태워 없애도록 상소해, 이를 관철하였다. 170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곧 이어 검열이 되었다. 1712년 정언이 되고 이듬해 윤세수(尹世綏)의 .. 2022.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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