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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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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당의 묘지기행783

(문신) 백석 정중만, 향주 전주이씨 -해주정씨- 자는 여일(汝一) 호는 백석(白石) 필선 식(植)의 아들 14살에 현종이 인평대군의 딸과 혼인하게 하였고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젊어서부터 글씨를 잘 써서 대권안의 여러 편액을 썼다. 1689년 사옹원 직장이 되었다가 익위사 부솔(副率)로 옮겼다. 이듬해 죄없이 철산으로 귀양 갔다가 1694년에 풀려 돌아와 위솔랑(衛率郞) 형조감(刑曹監)으로 승진되고 안음현 현감으로 나가게 되었다. 아껴 쓰고 남는 것으로 제민고(濟民庫)를 처음 만들었다. 황간현감으로 나가 다스리는 일이 가장 뛰어난지라 청도군수로 승진되었다. 이어 함열 양근 진산의 각 군수와 의금부 도사 형조정랑 충훈부도사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전라도 찰방을 역임하였다. 1728년 한성주부로 원종공신에 참여하여 아버지 필선공을 이조판서로 추증 .. 2023. 11. 29.
(고려 문관) 인헌공 강감찬 -금천강씨, 귀주대첩- 고려 전기에, 서북면행영도통사, 상원수대장군,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금주(衿州). 초명은 강은천(姜殷川). 경주에서 금주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姜餘淸)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姜弓珍)이다. 983년(성종 3) 과거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서경(西京)을 침공하자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현종(顯宗)을 나주(羅州)로 피난시켜 사직을 보호케 하였다. 이듬해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翰林學士) · 승지(承旨) ·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 중추원사(中樞院使) · 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냈다. 1018년(현종.. 2023. 11. 20.
(문신) 의졸 남일성, 정경부인 안동권씨 -의령남씨-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덕휘(德輝), 호는 의졸(宜拙). 부친은 남식(南烒)[1589~1650]이고, 동생은 남이성(南二星)[1625~1683], 아들은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다. 평소에는 어버이를 공경하는 데 힘을 썼고, 관직에 종사할 때는 절용(節用)을 우선으로 하였으며, 재물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1656년(효종 7)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고, 1659년(효종 10)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를 거쳐 진천현감으로 부임하였다. 1662년(현종 3) 전패(殿牌)를 도둑이 훔쳐간 일에 책임을 지고 파직되어 서울로 돌아왔으나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고 상평랑(常平郞)에 임명되었다. 1663년(현종 4) 통례원인의겸한성부참군(通禮院引儀兼漢城府參軍)을 제수받았다... 2023. 11. 20.
(문신) 혜지 박혜, 의인 성주여씨 -밀양박씨- 본관은 밀양 자는 혜지, 형님은 문도공 박훈이시다. 2023. 11. 13.
(문신, 토정비결) 토정 이지함, 공인 완산이씨 - 한산이씨-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형중(馨仲), 호 수산(水山)·토정(土亭)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현 마포 용강동 부근)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 토정이라는 호가 붙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6대손으로, 현령 이치(李穉)의 아들이며,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의 숙부이다. 아버지 이치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507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와 수원 판관 등을 지냈다. 어머니 광산김씨는 판관을 지낸 김맹권(金孟權)의 딸이며, 김맹권은 세종으로부터 단종의 보필을 부탁받았으나 수양대군이 집권하고 단종이 죽게되자 낙향하여 여생을 은거한 인물이다. 1517년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나 1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 2023. 11. 10.
(부도) 정지국사 -보물 제 531호- 속성은 김(金), 호는 축원(竺源)이다. 황해도 재령에서 아버지 연(延)과 어머니 윤씨(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332년(충숙왕 복위 1) 장수산 현암사(懸菴寺)로 출가하여 《능엄경(楞嚴經)》을 배워 깊은 뜻을 깨달았다. 1353년(공민왕 2) 무학(無學)과 함께 원나라로 가서 지공(指空)의 인가를 받은 나옹(懶翁)의 제자가 되었다. 1356년 귀국하여 은둔하며 수행에만 힘써 법회를 열지 않았다. 개풍 영천사의 대장경을 용문사로 옮겨 봉안하였다. 천마산 적멸암(寂滅庵)에서 나이 61세, 법랍 54세로 입적하였다. 나라에서 정지국사(正智國師)의 시호를 내렸으며, 제자 조안(祖眼) 등이 미지산(彌智山) 용문사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네이버 지식백과] 지천 [智泉]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023. 11. 6.
(공신, 용인시 향토유적) 순양부원군 상경 안몽윤, 정경부인 한산이씨 -순흥안씨, 진무공신-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상경(商卿). 아버지는 직장(直長) 세복(世復)이다. 음보로 군직에 나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군을 토벌하고, 선조가 8도에 내린 명에 의하여 부적행위(附敵行爲)를 하며 구날(構捏 : 억측으로 일을 꾸밈)을 일삼던 왜역관 김덕회(金德澮)·김응관(金應灌)을 목베어 행재소에 보냈다. 전주 분조(分朝 : 비상 시에 정궁을 떠나 다른 장소에서 국정을 전담하던 임시조정)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599년에 부장(部長)으로 창덕궁을 지켰으며 그 뒤 사헌부감찰을 거쳐 남포현감·옥구현감·안동판관 등의 외직을 지내면서 일을 잘 처리하여 함안군수에 승진하고, 1612년(광해군 4)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이듬해에 우림장(羽林將), 1618.. 2023. 10. 23.
(독립운동가, 교육자) 김명신 김명신(金明信)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로 3.1 만세 운동 당시 해주군의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가 투옥, 후에 석방되었다. 한국의 초기 여자 전도사 주룰루의 아들이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자의 한 사람이었던 박희도는 그의 사촌 누이에게 부군이 되었다. 한국의 초기 여자 전도사 주룰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박희도의 처사촌이다. 어머니 주룰루가 가정폭력을 피해 가출할 때 따라 나왔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이 곧 사망하여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1919년의 3.1 만세 운동 직전 경성에서 만세 시위 유인물과 태극기를 인쇄하여 해주군으로 비밀리에 이송하였다. 3월 1일 3.1 만세 운동이 발생하자 해주군 해주읍 내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지자 최성모, 박희도, 오현경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 2023. 10. 19.
(협객) 조일환 - 김두한 후계자 협객 조일환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다. 분명 좋은일도 많이 했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했던것 같다. 조일환(曺一煥, 1938년~2009년 7월 13일)은 김두한의 후계자이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열일곱살이 되던 해방 전후 충남 천안 지역 주먹계를 평정한 뒤 1974년 육영수 저격 사건 당시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며 천안 시내 유관순 동상 앞에서 새끼손가락을 잘라 항의한 바 있다. 2005년 3월에는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의 망언과 신사참배, 역사 교과서 왜곡 중단 반성을 촉구하며 조씨의 아내와 아들이 손가락을 절단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기독교에 귀의했다. 이후 2009년 7월 13일에 사망하였다. 2023. 10. 9.
(효자) 희주 송지겸, 부인 청주한씨 -야성송씨, 의원- 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야성. 자는 희주(希周). 양지현(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에서 출생하여 천성이 지효하였다. 부친이 생존해 계실 때에는 조석으로 문안하고 겨울에는 행여 방이 찰세라 군불을 지펴 따뜻하게 하였으며, 하인을 시키지 않고 반드시 손수 하였다. 부친의 환우 중에는 험한 고개를 넘어 20여 리나 되는 다른 동네에 피접처를 정한 후 시탕 간병하였는데 늦은 밤에는 범이 나타나 길을 밝혀 주었다고 한다. 친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고 거상 중에는 고기를 먹지 않고 소식하였다. 부친으로부터 전수받은 의술로 명의라는 이름을 남겼다. 언젠가 궁궐에 초치되어 왕의 진맥을 보고 곧 퇴궐하여 급히 탕제를 지어서 입궐하였더니 임금께서 이미 붕어하셨기로 왕의 환우를 치.. 2023.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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