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반응형

전주이씨158

(선조) 정정옹주. 진안위 류적 -진주류씨- 정정옹주, 진안위 류적 선조의 후궁 정빈(貞嬪) 홍씨(洪氏)의 소생으로 선조의 아홉번째 딸이다. 선조 37년(1604) 정정 옹주로 봉해지고 광해군 2년 진안위(晋安尉) 류적에게 출가하였다.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이 강화도에서 증살(蒸殺)되었고 이어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繼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모하려 하자 지아비와 더불어 이를 반대하였다. 후에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인조는 광해군 치하에서 진안위가 정의롭게 처신하였다 하여 통헌대부에 추증하고 정정 옹주에게도 두터운 예로 대우하였다. 후사가 없어 시동생 영(潁)의 아들 명전(命全)을 양자로 삼았으나 명전도 문과에 급제한지 2년만에 요절하였다. 이후 2년만에 옹주도 타계하니 현종은 정사를 폐하고 장례비용을 후사하였으며 스스로.. 2016. 7. 3.
(효종) 숙정공주, 동평위 죽헌 정재륜 -동래정씨- 숙정공주, 동평위 죽헌 정재륜 - 숙정공주(淑靜公主, 1645년 ~ 1668년 6월 13일(음력 5월 5일))는 조선 시대의 왕족이다.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 1649~1659)과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1618~1674)의 5녀이다. 그녀가 태어나던 해 청나라에서 볼모로 있다가 조선으로 귀국한 백부 소현세자가 죽고, 아버지 봉림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아버지 효종이 즉위하고, 8살이 되던 1652년(효종 3년) 숙정공주(淑靜公主)에 봉해졌다. 이후 12살 때인 1656년(효종 7년) 영의정을 지낸 동래 정씨 정태화의 아들 정재륜(鄭載崙)과 혼인하였다. 이때 정재륜은 동평위(東平尉)에 책봉되었다. 숙정공주는 1668년(현종 9년) 음력 5월 5일 24.. 2016. 7. 3.
(문신) 용재 이행 [문헌공], 정경부인 전주이씨 -덕수이씨- 문헌공 용재 이행 1478(성종 9)∼1534(중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水)·청학도인(靑鶴道人). 지돈녕부사 명신(明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온양군사 추(抽)이고, 아버지는 홍주부사 의무(宜茂)이며,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교리(敎理) 희(熺)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예문관 검열·봉교, 성균관전적을 역임하고,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0년 하성절질정관(賀聖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홍문관수찬를 거쳐 홍문관교리까지 올랐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사간원헌납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 2016. 6. 5.
(문신) 분사 이성구 [정숙공], 정경부인 파평윤씨, 정경부인 안동권씨 -전주이씨- 정숙공 분사 이성구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分沙) 또는 동사(東沙), 시호는 정숙(貞肅). 수광의 장남이다. 1603년(선조 36) 진사에 오르고, 1608년(선조 41)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한원에 들어가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광해군 초기에 전적 감찰에 이어 예조·병조·형조의 좌랑·부교리·헌납·병조정랑·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헌납으로 있을 때 아버지는 대사헌을, 동생 민구는 홍문관 부제학을 지냄으로써 3부자가 삼사의 언관직에 같이 봉직하여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지평으로 있을 때 영창대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시론(時論)에 반대하였으며,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정협(鄭浹)을 천거하여 종성판관으로 삼자 이를 문제삼는 간당(奸黨)들을 저지하다가 파직되었다... 2016. 5. 22.
(문신) 지봉 이수광 [문간공], 정경부인 안동김씨 -전주이씨- 문간공 지봉 이수광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시호는 문간(文簡). 병조판서 희검(希儉)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문화류씨이다. 16세 때 초시에 합격하였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20세에 진사가 되었고, 1585년(선조 18) 23세에 별시 병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으며, 27세에 성균관 전적을 거쳐 그 이듬해에는 호조와 병조의 좌랑을 지냈으며,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30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방어사 조경의 종사관이 되어 종군하였으나, 아군의 패배 소식을 듣고 의주로 돌아가 북도선유어사가 되어 함경도 지방의 선무활동에 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 35세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는데 그 해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또 명나라에서 중극전과 건극전.. 2016. 5. 22.
(문신) 동고 이희검, 정경부인 문화류씨 -전주이씨- 동고 이희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질(景質), 호는 동고(東皐) 또는 국재(菊齋). 비(裶)의 현손이며, 모양군(牟陽君)식(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사정(仙槎正)승손(承孫)이고, 아버지는 하동령(河東令) 유(裕)이며, 어머니는 유곤원(柳坤元)의 딸이다. 수광(晬光)의 아버지이다.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학유·정랑·교리 등을 거쳐 승지·오위장을 지내고 사간에 이르렀다. 이때 왕실의 인척임을 기화로 횡포를 부리는 이량(李樑)을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장단부사로 좌천되었으나 드디어 이량이 쫓겨나게 되자 다시 우승지에 제수되었다. 1572년(선조 5)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병조참의·대사헌을 거쳐 호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지내고, 지경연사(知經筵事)를 지냈.. 2016. 5. 22.
(예종) 제안대군 이현 [영효공], 상산부부인 상주김씨 -전주이씨- 영효공 제안대군 이현 1466년(세조 12)∼1525년(중종 20). 예종의 둘째아들이며, 이름은 현(琄). 자는 국보(國寶). , 어머니는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韓氏)이다. 4세 때 부왕인 예종이 죽자, 왕위계승의 제1후보자였으나 세조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아직 어리고 총명하지 못하다고 반대하여 대신 성종이 예종을 이어 왕위에 즉위하였다. 1470년(성종 1) 5세의 나이로 제안대군에 봉해져 녹봉(祿俸)과 직전(職田)을 지급받았으며, 후일 세종의 제5자인 평원대군(平原大君) 임(琳)의 후사로 입양되었다. 12세에 사도시정(司䆃寺正) 김수말(金守末)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어머니 안순왕후에 의하여 내쫓긴 바 되어, 14세에 다시 박중선(朴仲善)의 딸과 혼인하였지만, 김씨를 끝내 못잊어하자 1485년 성종.. 2016. 4. 26.
(세종) 평원대군 이임 [정덕공], 강녕부부인 남양홍씨 -전주이씨- 정덕공 평원대군 이임 1427년(세종 9)∼1445년(세종 27) 세종의 왕자. 이름은 임(琳). 자는 진지(珍之). 호는 근행당(謹行堂). 소헌왕후(昭憲王后) 청송심씨의 소생이다. 1434년(세종 16) 8세에 평원대군으로 봉군(卒記에는 13세에 봉군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1437년 종학(宗學)에 입학, 호군(護軍) 홍이용(洪利用)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후 학문에 진력하여 시(詩)·예(禮)·《대학연의 大學衍義》에 숙달되고, 또 서체(書體)와 사어(射御)에도 능숙하였으나, 1445년 1월 두창(痘瘡: 천연두)으로 죽었다. 성품이 겸손하고 효행과 우애가 있었으므로 세종의 아낌을 받았으며,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세종 말년의 신병 등과 함께 세종의 숭불을 촉진시킨 한 원인이 되었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 2016. 4. 26.
(해원군) 화창군 이연, 군부인 광산노씨 -전주이씨- 화창군은 인성군의 제3자 해원군의 아들이니 선조의 증손이 된다. 인조 18년(1640)에 출생하여 47세의 일기를 마쳤다. 군부인은 광산인 사헌부감찰 노경명의 따님이시다. 2016. 4. 24.
(조선) 인성군 이공 [효민공], 해평군부인 해평윤씨 -전주이씨- 효민공 인성군 이공 휘는 공(珙), 호는 백인당(百忍堂), 시호는 효민(孝愍). 선조대왕의 7남으로서 정빈 민씨 소생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해서 선조대왕이 몹시 사랑했었다. 학업은 일취월장했고, 필법은 달관, 단정하고 힘이 있었다. 12세에 인성군에 봉해지고 사옹원 · 종부시 도제조와 종친부 유사의 책임을 겸했는데 사무 처리가 너그럽고 엄하며 공명정대하여 간사한 무리들이 범접하지 못했다. 또한 호령을 한번 내리면 모두들 두려워 했으며 광해군이 날로 꺼려했고 이이첨 등은 공의 인망을 시기하여 사형수에게 무고하도록 종용했다. 그래서 궐하에 석고대죄하고 죄를 기다린지 수 일만에 울분으로 병이 나서 3년을 일어나지 못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임금은 숙부로서 존경했다. 그러나 아직 .. 2016. 4. 24.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