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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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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158

(태조) 익안대군 이방의[안양공] -전주이씨- 익안대군 안양공 이방의 이름 방의(芳毅). 시호 안양(安襄).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소생. 1392년 태조가 즉위하자 익안군(益安君)에 봉해졌으며, 1398년(태조 7)의 제1차 왕자의 난과 1400년(정종 2)의 제2차 왕자의 난에 아우 방원(芳遠:太宗)을 보좌하여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과 좌명공신(佐命功臣) 2등에 각각 책록되고,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1398년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에 추록(追錄)되고 1400년(태종 즉위) 대군(大君)이 되었다. 정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마한공(馬韓公)에 추봉되었다. 후배 부부인 이씨묘는 양주 이나 실전된듯 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익안대군 [益安大君] (두산백과) 2015. 12. 8.
(태종) 양녕대군 이제[강정공], 수성부부인 광산김씨 -전주이씨- 양녕대군 강정공 이제 1394(태조 3)∼1462(세조 8). 조선 전기의 왕자. 이름은 제(禔). 자는 후백(厚伯). 태종의 장남이고, 어머니는 여흥 민씨로 민제(閔霽)의 딸이며, 부인은 광주 김씨(光州金氏)로 김한로(金漢老)의 딸이다. 1404년(태종 4)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 범절이라든가,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이나 엄격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남몰래 궁중을 벗어나서 사냥을 하는 등의 자유분방한 풍류 생활을 더 즐겼다. 이와 같은 품행은 부왕인 태종의 눈에도 걱정스럽게 비쳤으며, 엄격한 유학자들에게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몇 차례 그에게 군왕으로서 지녀야 할 덕행을 닦도록 타이르기도 하고, .. 2015. 12. 8.
(15) 광해군묘(光海君墓) - 광해군(光海君), 문성군부인(文城君夫人) 문화류씨 광해군(光海君, 1575년 6월 4일 (음력 4월 26일) ~ 1641년 8월 7일 (음력 7월 1일)[1])은 조선의 제15대 임금이다. 성은 이(李), 휘는 혼(琿),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었고,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으는 데에도 힘썼다. 임진왜란 동안 세자의 몸으로 부왕을 돕고 전쟁 승리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부왕의 인정과 칭찬은 커녕 견제와 냉대를 당해야만 했다. 임진왜란 이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며, 후금과의 전쟁 위기 상황에서 실리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2015. 11. 25.
(13) 강릉(康陵) - 명종(明宗), 인순왕후(仁順王后) 청송심씨 강릉(康陵) 명종(明宗), 인순왕후(仁順王后) 청송심씨 - 명종은 중종의 둘째 아들로 1534년(중종 29) 5월 22일 태어났다. 1539년(중종 34) 12월 21일 경원대군에 봉해졌으며, 1542년(중종 37) 11월 심강의 딸과 결혼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545년 7월 6일 인종의 뒤를 이어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탓에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 사건 등을 계기로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과 소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왕권은 실추되고 외척 일족의 수탈로 민생이 피폐하여 사회가 불안하였으며, 거듭되는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명종이 20세가 되던 해인 1553년(명종 8)에는 문정왕후가 8년 간의 수.. 2015. 9. 5.
(10) 연산군묘(燕山君墓) - 연산군(燕山君), 거창군부인(居昌郡府人) 거창신씨 연산군(燕山君) 거창군부인(居昌郡府人) 거창신씨 - 연산군은 1506년 11월 유배지인 강화 교동에서 31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부인 신씨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로서, 연산군의 폐왕과 함께 폐비가 되었다. 연산군이 죽은 뒤에는 묘를 강화에서 양주군 해동면 원당리(현 위치)로 이장하기를 청하여, 1513년 2월 왕자군(王子君)의 예로 이장하고 양주군 관원으로 하여금 치제하게 하였다. - 연산군은 성종의 아들로 조선 10대 왕이다. 1494년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즉위 3년 동안은 별 탈 없이 정사를 펼쳤다. 그러나 1498년(연산군 4) 훈구파 이극돈, 유자광 등의 계략에 빠져, 사초(史草)를 문제삼아 김종직 등 많은 신진 사류를 죽이는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1504년.. 2015. 6. 7.
(선조) 영창대군 이의 영창대군 이의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년~1614년)은 선조의 아들로, 인목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의(㼁)이다. 선조의 영창대군은 유일한 적자이다. 선조는 이미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을 싫어하여 영의정(領議政) 유영경(柳永慶) 이하 몇몇 신하와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몰래 의논하였다. 이 눈치를 안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은 세자를 바꿔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다가 선조의 비위를 거슬러 무근한 소리를 퍼뜨린다는 죄목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길 떠나는 것을 차일피일하던 차에 갑자기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광해군은 당일로 왕위에 올라 이들도 다시 불러 등용하였다. 1611년(광해군 3년)에 영창대군에 책봉되었다. 앞서 선조가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삼으려던 일 때문에 영창대군을 둘러싼 갈등이.. 2015. 6. 7.
(육괴정) 어은 임내신, 정부인 평해손씨, 정부인 전주이씨, 정부인 단양우씨 -풍천임씨- 육괴정 어은 임내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조원(調元), 호는 어은(漁隱) 또는 퇴휴(退休)이다. 1512년(중종 6) 평택현감을 지낸 임주(任柱)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538년(중종 3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검열, 사인을 지낸 후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참여하였다. 이후 수찬, 장령 등을 역임하였으며 1550년(명종 5) 예조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에 임명되어 《중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홍문관 교리, 판결사 등을 지냈고 1555년(명종 10) 동지 겸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가 다시 경직으로 돌아와 병조참지, 병조참의, 예조참의 등을 거쳐 1574년(선조 7) 좌승지를 지냈다. 벼슬에서 물러나 백사면 송말리에서 은거 .. 2015. 5. 17.
(육괴정) 규정 강은, 숙부인 전주이씨 -진주강씨- 육괴정 규정 강은 1492(성종 23)∼1552(명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청로(淸老), 호는 규정(葵亭). 이천 출신. 아버지는 자인(子仁)이다. 1510년(중종 5)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삼등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임용되었으나, 이해 기묘사화로 파방(罷榜 : 과거 시험의 급제자를 무효로 함)되었다. 1540년에 예빈시참봉이 되고, 1546년(명종 1)에 현량과가 복구되어 전적(典籍)에 올랐으나 사은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인종이 죽자 매일 의관을 정제하고 북향으로 꿇어앉아 울었으며 노후에는 김안국(金安國)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며 세월을 보냈다. 2015. 5. 16.
(육괴정) 모재 김안국 [문경공], 정경부인 전주이씨 -의성김씨- 육괴정 문경공 모재 김안국 1478(성종 9)∼1543(중종 38). 조선시대 문신·학자.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참봉 연(璉)의 아들이며, 정국(正國)의 형이다. 조광조(趙光祖)·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 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생진과에 합격, 1503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07년(중종 2)에는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지평·장령·예조참의·대사간·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각 향교에 ≪소학≫을 권하고, ≪농서언해 農書諺解≫·≪잠서언해 蠶書諺解≫·≪이륜행실도언해 二倫.. 2015. 5. 16.
(중종) 봉성군 이완 [의민공], 동래군부인 동래정씨 봉성군 의민공 이완 ?∼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종실. 중종의 여섯째아들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완(岏), 자는 자첨(子瞻). 희빈홍씨(熙嬪洪氏) 소생이며, 영의정 정유인(鄭惟仁)의 딸과 혼인하였다. 1545년(인종 1) 인종의 병사를 계기로 정세를 만회한 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 등은 정권의 기반을 굳히고자 을사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제거하고, 아울러 종친 중에서 명망이 있었던 봉성군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리하여 임백령(林百齡)은 때마침 하옥된 이덕응(李德應)을 위협하여 봉성군을 추대하여 역모를 꾀하였다고 거짓 자백하게 하여 죄를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왕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기는 “인종의 병이 위독할 때 윤임(尹任) 등이 봉성군으로서 왕위를 이으려고 하다가 형세가 .. 2015.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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