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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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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광은군 김진구 [경헌공], 정경부인 한산이씨 광은군 경헌공 만구와 김진구 1651년(효종 2)∼1704년(숙종 30). 조선 숙종 때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수보(守甫), 호는 만구와(晩求窩). 영돈령부사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만기(萬基)의 아들이고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오빠이다. 168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관이 되어 《현종실록》 수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정언·헌납·교리·응교·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684년 경상감사가 되었으며 이어 승지가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에 의하여 남인정권이 들어서자 김석주(金錫胄)와 함께 가혹한 수법으로 남인을 숙청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풀려나 호조판서에 기용되고, 곧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도승지·전라.. 2012. 9. 15.
해주정씨 8대봉군 해주정씨 8대봉군 휘 군호 벼슬 묘소 5대 정종 (鄭悰) 영양부원군 문종대왕 사위 영양위 (배 경혜공주) 대자동 6대 정미수 (鄭眉壽) 해평부원군 우찬성 사릉 7대 정승휴 (鄭承休) 해림군 충훈부도사 사릉 8대 정원희 (鄭元禧) 해령군 사헌부감찰 사릉 9대 정흠 (鄭欽) 해성군 돈령부판관 사릉 10대 정효준 (鄭孝俊) 해풍군 돈령부지사 사릉 11대 정식 (鄭植) 해원군 남양부사 여주 12대 정중휘 (鄭重徽) 해흥군 의금부지사 사릉 - 성명을 클릭하시면 묘소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내용이 틀린 경우 말씀하시면 수정하겠습니다. - 사릉복릉(復陵)으로 인하여, 해원군묘소는 서초 백석동에 이장되었다가 다시 여주로 이장하였다. - 영양위 정종묘소와 부친되시는 형조참판 정충경묘소가 실전이 되었는데 왜 실전이 되었.. 2012. 9. 15.
조선최고의 벼루 장인 -석치 정철조- 오늘날도 그렇지만 벼루 깎는 장인은 좀체 그 이름을 남기는 법이 없다. 그런데 이 벼루로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긴 인물이 있다. 그것도 벼루를 전문으로 만드는 기술자도 아닌, 문과에 급제해서 정언 벼슬까지 지낸 양반 사대부가 말이다. 그의 이름은 정철조다. 당시 안목 있다는 사람으로 그가 깎은 벼루 하나쯤 소장하지 못하면 부끄럽게 여겼을 정도라는 그의 벼루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정철조와 그의 벼루를 소개한다. 벼루에 미친 사람 정철조(鄭喆祚, 1730~1781)는 본관이 해주로 자는 성백誠伯, 호가 석치石癡다. 45세 나던 1774년에 문과에 급제했고 벼슬은 정언正言을 지냈다. 아버지 정운유(鄭運維, 1704~1772) 역시 문과에 급제하고 공조판서까지 지냈던 인물이었다. 정철조는 그의 장남이었다... 2012. 9. 13.
벼루에 미친 사람 -석치 정철조- 벼루에 미친 사람 "석치 정철조" 석치 정철조 필자인 저의 8대 조부님 이십니다. 오늘은 그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2004년도 "시간여행 역사 속으로" 프로그램에서 저의 8대 조부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적이 있어 소개 하고 자 합니다. 병세재안록에 벼루에 미친 사람이있으니 그 이름은 정철조 호는 석치(石痴)다. 라고 하였습니다. 석치(石痴) 뜻을 풀의 하자면 돌이 미친 사람이란 뜻입니다. 왜 그런 호를 사용하셨는지 그분이 얼마나 괴짜 셨는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석치 할아버지는 차고 다니는 칼만 가지고 벼루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돌만 보면 벼루를 깎았으니, 석치라는 호가 철조할아버지와 잘 어울립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정언이라는 벼슬을 하셨지만, 기록을 보아 벼슬에 뜻이 있지 .. 2012. 9. 12.
(종친) 흥인군 이최응 [문충공] 흥인군 효헌공 산향 이최응 이최응(李最應, 1815년~1882년)은 조선 시대의 왕족으로 흥선대원군의 형이다. 자는 양백(良伯), 호는 산향(山響), 군호는 흥인군(興寅君)이다. 남연군과 군부인 여흥민씨의 셋재 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의 바로 윗 형이었다. 시호는 효헌(孝憲)이었다. 흥녕군과 흥완군의 동생이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친형이었으나, 그는 바로 아랫 동생 이하응에게 무시당했고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뒤에 명성황후는 그가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좋지 않은 점을 이용하여 그를 끌어들인다. 헌종 때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고종 즉위 후 1866년에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도감 당상이 되었다. 그뒤 판의금부사, 호위대장, 좌의정, 판종정경, 영의정 등을 거쳤으며, 1881년 통리기무아문의 총리대신에.. 2012. 9. 10.
(관직) 소평공 우재 정미수 신도비 소평(昭平) 정공(鄭公) 신도비명(神道碑銘)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行) 의정부우찬성 영경연사 판의금부사(議政府右贊成領經筵事判義禁府事)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증시(贈諡) 소평(昭平) 정공(鄭公)의 신도비명 : 서문(序文)을 아울러 기록하였다.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행한성부판윤(行漢城府判尹) 진천군(晉川君) 강혼(姜渾)은 비문(碑文)을 짓고, 통덕랑(通德郞) 예조정랑 겸 승문원교리(禮曹正郞兼承文院校理) 김희수(金希壽)는 비문의 글씨를 쓰다. 정덕(正德) 임신년(1512, 중종 7) 4월 15일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공(鄭公)이 병으로 사망하였다. 부음(訃音)을 듣고 3일 동안 조시(朝市)를 정지하였으며 .. 2012.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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